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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문사설선집 1권, 한성순보, 한성주보
 

2003-01-22 

일시 : 2001년 1월 15일 월요일 3시 반
장소 : 동원생활관 회의실
참석자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김영호, 김용직, 박지향, 손열
읽을거리 : {韓國新聞社說選集} 1권 [漢城旬報], [漢城週報]

 


 

주요토론내용

 

신욱희 교수

아시아가 쇠락한 이유를 常道만을 취하고 변화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순보]는 그 내용을 自强과 富國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순보]에서는 부국론을 논하면서 원래부터 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富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익의 근원을 찾고 나라의 財力을 발휘할 수 있는 근대적인 부국론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 생각이 기술을 창출하고 그 기술이 법을 창출하는 자강론의 단계를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 이 주장들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는 부국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순보]의 내용을 국제정치학적으로 살펴보면 '세계가 할 일이 있고, 한 나라가 할 일이 있다'고 언급하면서, 공의, 공법, 국제기구 등 영원한 계책과 한 나라가 해야 할 목전의 일을 구분하고 있다. 보편적인 현실로서 전쟁은 通史라는 것을 인정하며, 전쟁이 통사가 아닌 和平이 통사가 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으나, 만국의 정치체제가 모두 같아질 수 없으며 공법이 만사형통의 도가 아니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순보]의 사설은 자강론을 펼치고 있지만, 서구는 호전적이라는 인식을 깔고 있다.

 

[주보]의 경우 [순보]의 속간 형태를 띠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더 담고 있다. 조약과 공법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며, 강약과 빈부만이 만국의 통사에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현실적인 국제정치관을 견지하고 있다. '論貨幣'부분에서는 부에 관련되고 통상의 국면을 규율하는 것들은 통일된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20세기 말 지구화(globalization)의 국면과 비슷한 시세 인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최정운 교수

발제문 참조.

 

손   열 교수

[주보]에서는 경제부문의 구체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한말 개화기의 문헌들에서 볼 수 있는 부국론 중 일본에서 나돌던 '식산흥업론'과 유사하게 광법교육, 광무국 설치, 사영광업 등 광산에 대한 관심, 나라의 예산을 갖추기 위해서 통계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등의 '식산흥업론'과 '통상국가론'이 드러나고 있다.

 

하영선 교수

[순보]와 [주보]의 발간에 끼친 이노우에 가쿠오의 역할은 지금까지 과장되어 있는 측면이 있다. 본래 [순보]는 박영효가 처음 기획했다가 김윤식의 동생인 김만식에 의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중국의 기사를 轉載하는 경우가 많고, 기사의 내용도 중국의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중국의 기사를 옮겨 적으면서도, 일본의 견해를 인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순보]와 [주보]는 당시 3000부 가량 찍혔고, 기사의 내용에 따라 청의 이홍장이 항의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문이 나오게 된 경위와 배경을 들여다 볼 때 당시 상황이 '斥邪', '東道西器', '開化'라는 세가지 담론이 뒤섞여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당시의 정세와 생각들에 대한 가치있는 사료들을 [순보]와 [주보]가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장인성 교수

일본은 지식의 변화기였고, 중국은 계몽기에 접근해 가고 있었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순보]와 [주보]의 주요내용인 세계지리, 서양의 과학기술, 인도지나 반도의 정치상황 등 국제정세라는 세가지 범주로 나뉘어진다면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중국의 이야기가 더욱 절실했으며 받아들이기도 훨씬 쉬웠을 것이다. 따라서 박영효의 주관 하에 있었어도 그 내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영선 교수

개화로 향하는 일련의 사건들. 1980년 조선책략, 1981년 상소, 임오군란을 거쳐서 한성순보가 발간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순보]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청의 세력과 국내권력을 잡은 김윤식 등 친청파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순보]와 [주보]를 통해 그 당시의 분위기를 읽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정운 교수

갑신정변 후 일본군과 청군이 들어오고, 제국주의에 대한 위기감이 대두하였다. 따라서 [주보]에서는 일본에 관련된 이야기가 더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용직 교수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다르다. 아직까지는 국내정치적으로 변혁의 이야기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 두 신문 속에서도 '變法自强'보다는 '동도서기'의 입장이 더 강조되고 있다.

 

최정운 교수

당시의 식자층은 신문에 언급되어 있는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나, 독자층과의 간극을 메꾸기 위한 전략적인 말투를 취하고 있다.

 

장인성 교수

아직까지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위기'라고 인식하지도 못한 것으로 보인다.

 

최정운 교수

우리가 흔히 '동도서기'로 표현하는 것은, 사실 신문을 만든 이들은 동양과 서양을 합하려고 했던 것이다.

 

신욱희 교수

그것은 '가려 취하고 정도를 지킨다'는 발간사의 뜻을 살리지 못한 것이다.

 

김용직 교수

'論法律' 부분을 보면 서양과 근대국가의 법률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갑자기 大典會通에 대한 이야기로 회귀하는 등 서양의 개념과 제도를 설명하다가 그것과 동양의 것을 뒤섞는 논법을 보이고 있다.

 

하영선 교수

日人이 쓴 기사를 중국신문이 싣고 [순보]가 다시 전재하는 것은 그 아이디어가 구미에 맞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최정운 교수

약자의 평화주의가 중국과 한국의 입장에 어떤 적실성이 있겠는가?

 

박지향 교수

이 텍스트를 보고 당시 '개화'나 '동도서기'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광동 지방의 중국 신문 몇 개를 짜깁기 해 놓은 것이 아닌가?

 

장인성 교수

[순보]가 전재한 신문들이 당시에는 대규모로 발행되었고 식자층이 즐겨읽던 신문이므로 [순보]의 의미 또한 과소평가할 수 없다.

 

박지향 교수

'이재'에 관련된 부분은 특히 그러한데, 신문의 중간에 보험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것이 신문기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우연성, 동시대의 눈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얼토당토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정운 교수

우리의 부국 개념과 그네들이 가지고 있는 부국개념은 상당히 다른 것이기에 '보험' 등의 소재가 적실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 식의 판단일 수 있다. 또 글을 볼 때, 아무리 완고한 척사파라고 할지라도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電氣 등과 관련된 서술도 그렇지 않은가? 보험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신욱희 교수

사설의 한계는 분명히 지적할 수 있겠으나, 사실 지금의 사설보다는 훨씬 식자층에 대한 영향력이나 파장이 크리라 생각된다.

 

하영선 교수

[순보]는 국제와 국내를 다루는 비율이 10:1 정도이고 [주보]는 1:1 정도인 것으로 볼 때 국제계몽을 중심으로 한, 신문 자체의 성격이 국제정치적이라는 점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신문으로 보인다.

 

김용직 교수

'중국은 제국이기 때문에 다양성이 없다'라는 식의 논평으로 보아 많은 고민 후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최정운 교수

갑신정변의 위기의식이 세계정세에 대한 관심 증대로 이어진 것 아니겠는가? 이 신문들이 마치 snap-shot을 찍듯 단편적으로 국제정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은 드나, 이를 아우를 만한 큰 틀은 아직 없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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