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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일기>11권
 

2003-01-22 

2000년 11월 세미나 기록

 

일시 : 2000년 11월 18일(土) 3시 반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3회의실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김영호, 김용직, 박지향, 김석근, 안인해 
독회내용 : 윤치호일기 11권

 


 

주요토론내용

 

김용직 교수

이번 권은 윤치호 일기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한국기독교계의 친일문제가 주제임. 연표상으로 볼 때 일기가 시작되는 38년 상반기에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미나미 총독의 황국신민화정책이 시작된 시기임. 윤치호의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은 그것이 단지 ritual에 불과하므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 종교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이번 권은 감리교였던 YMCA에서 윤치호의 활동이 중요내용. 적극적인 친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compromise, collaboration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 일기상으로 볼 때 그가 관여하고 있던 CCC, YMCA, 각 교육기관에 대한 예정된 핍박 때문에 일제에 협조함으로써 학교와 단체를 살릴 수 있다는 현실적 필요를 곳곳에서 제기하고 있는데, 궁색한 변명과 같은 생각이 듦. 마치 자신의 일기를 남이 본다는 가정 아래서 쓰고 있다는 느낌. 크게 보아, 여기서는 종교문제와 일제에 대한 타협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음. 흔히 친일의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친일 자체를 사회적 맥락과 연결시켜 collaboration으로 볼 수 있음. 친일단체를 살펴봄에 있어 그 단체들이 방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함. 친일 對 독립운동이라는 이분법적인 역사해석이 가질 수 있는 문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

 

국제문제에 대한 연결이 두드러지는 것도 큰 특징으로 볼 수 있음. 일본의 팽창주의에 대한 윤치호의 입장은 일본에 저항한다는 것이 어리석고 무의미하다는 탄식이 글의 곳곳에 나와있는 것으로 살펴볼 수 있음. 당시의 상황을 국제정치학적으로 볼 때 일본은 열강의 세력균형을 깨고,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입장에서도 비난받아야 마땅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윤치호의 국제정치에 대한 분석은 상궤를 벗어나 있음.

 

김영호 교수

요약문 참조.

 

하영선 교수

이 일기는 [윤치호일기]의 마지막 권으로서 38년이 윤치호에게는 전환점으로 볼 수 있음. 소극적 친일에서 적극적 친일로 가는 전환점. 38년의 마지막 날의 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해는 'terrible year'였음. 그에게는 조선흥업회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음. 이와 관련해서 대개의 친일연구는 반일의 입장에 서 있는 연구가 대부분. 따라서 왜 적극적인 친일로 돌아섰는가라는 문제제기는 없는 상태. 일기의 뒷부분에 나타나는 'our japan'이라는 표현에서 이 시기 일본의 내선일체에 윤치호가 적극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남.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가는 분명하지 않음.

 

최정운 교수

어떤 친일파라도 독립에 대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기 마련. 하지만 윤치호는 전쟁을 독립의 여건으로 파악하지 않았음.

 

김용직 교수

당시 제국주의의 일반적인 경향이 '자치'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음. 윤치호도 자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음. 그러나 일기에 '자치'에 대한 고민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음. 실력양성과 자치의 문제가 영국과 인도의 협상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음.

 

하영선 교수

내선일체를 unification, union으로 표현하고 있음.

 

김영호 교수

한국은 일본의 스코틀랜드가 되어야지 아일랜드가 되어서는 안된다 라는 표현에서 자치에 대한 윤치호의 견해를 읽을 수 있음.

박지향 교수: 1707년 스코틀랜드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잉글랜드는 많은 것을 양보하고 일은 것으로 볼 수 있음. 아일랜드 통합과정과는 차이가 나는데, 1884년 3차 선거법 개정 때 아일랜드가 영국정치의 풍향을 좌우할 수 있는 100여석의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자 자치의 문제가 불거졌음.

 

김용직 교수

국내적으로 볼 때 20년대 초반 민원식을 필두로 한 친일단체가 '자치'론을 선점해 버렸음. 국민협회가 30년대 후반까지 '자치'론을 주장. 따라서 동아일보 또한 분리형 자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이미 '자치'라는 단어 자체가 친일적 색채를 띤 단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쓸 수 없었음. 하지만 동아일보가 생각하는 자치는 근다화라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도가 근대화 노선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간디의 비타협 노선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음.

 

하영선 교수

38년 이후 윤치호는 자치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아닌가?

 

박지향 교수

윤치호가 스코틀랜드를 어떻게 파악했는지가 의문. 완전한 동화에 초점을 맞춘 것인지, 문화와 언어를 지킨 채 영국의 일원이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가 확실치 않음. 일기 상으로 볼 때 일본 system 내의 완전한 동화를 상정한 것이라고 파악됨.

 

김영호 교수

소련의 개입가능성이 등장하고 전세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윤치호가 알고 있었는가?

 

하영선 교수

41년 11월 8일 진주만 습격 시의 일기를 볼 때 윤치호는 일제의 선전문구를 되뇌고 있다는 느낌.

 

박지향 교수

이 부분의 일기를 쓰던 당시에는 윤치호가 가지고 있었던 국제문제에 대한 정보의 통로가 끊어져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

 

김용직 교수

독일과 소련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와중에서도 일본을 비판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음. 20년대의 일기였다면 달랐을 것.

 

박지향 교수

독립신문에 '몰라요' 씨라는 필명으로 되어 있는 윤치호의 글을 보면 사회진화론의 색채가 다분함.

 

하영선 교수

그의 입장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식민지 시기와 식민지가 되기 전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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