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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일기>9권
 

2003-01-22 

2000년 8월 세미나 기록

 

일시 : 2000년 8월 29일(土) 오후 3시-8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3회의실
참석 : 하영선, 김영호, 손열, 장인성, 신욱희, 김석근 
독회내용 : 윤치호일기 9권

 


 

주요토론내용

 

손   열 교수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기의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일본과의 직접적 대결이 아닌 통치 자체는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지형에 서 있으면, 30년대에 들어 대동아공영권과 같은 통치시스템 내에서 몰려 따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0년대의 그의 행적에 대해 주목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김석근 교수

경제상황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영호 교수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Datta의 의견을 빌어 국제연맹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경제상황에 대해 말할 때에는 그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유럽의 귀족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등의 언급에서는 사실 언급에 그치고 왜 그것이 가능했는지 그리고 어떤 사회구조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지 등의 분석은 보이지 않는다. 또 만주사변을 보는 윤치호의 시각을 살펴볼 때 일전에 노재봉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약소국의 지식인이 강력정치(power politics)를 수용할 경우 그것이 칼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김용직 교수

일반 대중이 느끼는 분위기는 아니라 할지라도, 법령이나 포고령에서는 볼 수 없는 당시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김영호 교수

호전성에 대해 강조하는 부분에서 무솔리니를 찬양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30-40년대의 무솔리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였을까가 궁금해진다.

 

신욱희 교수

철도건설과 총독부(p.119) 등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에서 볼 수 있듯이 일기 전반에 걸쳐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비판도 하고 있지만, 일본에 대한 비판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김용직 교수

윤치호는 계속해서 '거역할 수 없는 대세가 변해갈 때, 움직여야 한다'라고 하는 신앙에 의거한 비정치적인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력양성론과 자치(Home Rule)을 강조하는 입장은 견지하고 있다.

 

손   열 교수

신앙과 국제정치의 지극히 현실주의적 입장이 같이 할 수 있는가?

 

김용직 교수

로마서를 보아도 신의 간섭이 있기 전까지는 군주의 권리는 신에게서 왔다는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해 보는 전통이 있다.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로'는 그의 만주사변, 국제연맹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분석과 어울릴 수 있다.

 

김영호 교수

고난받고 있는 조선민중의 부패와 타락을 비난하면서도 일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과는 어떻게 연결시켜 보아야 하는가?

 

김용직 교수

오리엔탈리즘의 차원에서 서양이 동양을 타자화했을 때 일본은 인류학과 민속학이라는 도구로 조선과 조선인을 타자화하였다. 윤치호 또한 그것에 감염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손   열 교수

'기독교인은 이런 입장에서 비기독교인보다는 나을 게 없다'(p.127)이라는 구절이 이 있는데, 이를 볼 때 윤치호에게서 종교의 역할은 그만큼 줄어들지 않는가?

 

하영선 교수

윤치호의 경우 남들이 만들어준 자아와 이등국민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타자화에 대한 반발로서 철저한 자기부정으로서의 이등국민으로 자신을 파악하고 있는가? 라는 문제는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일단은 현실분석으로부터 출발된 철저한 자기부정으로 보는 것이 더 맞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김용직 교수

윤치호가 일본과 물질적 이익이 동일하다는 가정에서 볼 때, 일본이 설파하고 있는 조선에 대한 입장을 윤치호가 완전히 흡수하였다고 볼 수 있지 않는가?

 

하영선 교수

윤치호는 미국에서도 불평을 계속했고, 조선에 와서도 그의 불만을 끊임없이 토로하고 있다. 이는 그가 포스트모던적인 고향상실증에 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는가?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불평을 터뜨리고 있지 않는가? 기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한평생 기독교와 함께 살아왔지만 그의 일기를 보았을 때 실천적인 입장에서 그에게 기독교가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영호 교수

니버가 20년대 말 낭만주의적 기독교사상이 널리 퍼져있을 때 유럽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부상을 저어하며 현실주의적인 기독교적 견해로서 미국사회에 경종을 울린 바 있다. 국내외적으로 이 시대 기독교도와 윤치호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김용직 교수

윤치호와 이승만을 비교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이승만도 같은 정치인이었지만 선전가(propagandist)이기 때문에, 항상 해결책을 찾고 그것을 선전했다. 하지만 윤치호는 개탄만 할 뿐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하영선 교수

지금 하고 있는 식민지연구와 비슷한 유형의 생각을 당시의 윤치호가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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