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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일기>8권
 

2003-01-22 

2000년 7월 세미나 기록

 

일시 : 2000년 7월 29일(土) 오후 3시-8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3회의실
참석 : 하영선, 손열, 장인성, 신욱희, 김용직, 김석근 
독회내용 : 윤치호일기 8권

 


 

주요토론내용

 

신욱희 교수 발제

(요약문 참조) 전체적으로 윤치호는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도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양비론적인 논조를 견지하고 있음.

 

장인성 교수 발제

8권 일기의 후반부는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대내적 인식, 대외적인 인식의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음. 식민지근대화론과 관련하여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기반시설을 구축하는 것이지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논조(p.389)를 보이고 있음. 조선인의 파당주의와 기생주의를 비난하는 부분, 공산주의와 기생주의를 관련시켜서 재일 유학생들의 사회주의에 경도되는 이유에 대한 본인의 생각(p.305)을 밝힌 부분, 총독부 비서실에 폭탄을 투하하는 등이 과격행동에 대해 반감을 드러낸 부분 등이 눈길을 끔. 윤치호 자신은 조선의 문제를 국제사회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일부으 움직임에 대해 강한 불신을 표명했는데 파리강화외의의 경험에서 우리가 얻은 것이 없듯이 당시 열렸던 워싱턴 군축회의에서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주장하며 국내에서 교육에 더 힘을 쏟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p.202).

 

국제정치적인 측면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전쟁에 대한 생각인데, 전쟁의 현실주의적인 측면에 충분히 공명하고 있으면서도, 신의 황금률에 따라 전쟁을 폐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 그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필요악으로 간주(p.312)하였는데 모든 진보와 발전은 투쟁과 전쟁에서 기인하며, 개인의 경우 호전성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요소가 되듯이 국가와 민족의 경우도 이에 예외가 되지 않는다는 예의 호전성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짐(p.469). 무조건적인 평화주의자들에게 평화는 이상이고 전쟁은 현실임을 인정할 것을 주문하면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요건에는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군주를 제압할 것. 전쟁에 대한 억지력을 갖출 것 등 여러 요소가 두루 갖춰져야 한다고 주장(p.409). 그의 종교관과 전쟁관에 대한 설명에서 윤치호는 종교는 본성이고 도덕은 이상적인 것이므로 항상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대신함(p.344).

 

이외에도 당시에 이슈가 되었던 사건들에 대한 그의 견해가 많은 부분에서 드러남. 민립대학 기성회에 대한 비판(p.362). 관동대지진과 그에 따른 돈 유출과 증세라는 조선에 끼칠 수 있는 영향(p.398), 동화정책에 대한 비판(p.457), 학문적 이상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는 이기심이라고 레닌의 혁명을 비난(p.436)한 부분이 눈길을 끔.

 

김용직 교수

상황인식에 있어 세부적인 부분에는 정통하지만, 역사의 긴 흐름을 보는 통찰력에는 모자란 부분이 있음. 일본에 대해서는 상당히 미묘하고 복잡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조선에 대해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을 찾아볼 수 없음. 3·1운동에 대한 가능성의 측면은 사실 조선인들보다는 외국인들이 객관적으로 보고 있음. 윤치호는 3·1운동이 집단체험의 기회였다는 것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음. 3·1운동은 Wilson의 민족자결론과 1차대전 이후의 세계정치판 재편이라는 객관적인 기회와 기독교계와 천도교계의 단합이 상징하는 조선의 리더쉽의 결집이라는 측면에서 동시에 파악해야 함.

 

하영선 교수

211쪽에 드러나 있는 윤치호가 不眠하는 네가지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 그는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사람들을 네가지 분류하였는데 위정척사, 무식한 계층, 불나방과 같은 학생들(허명개화), 기본적인 입장은 독립 쪽이나 용기와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들임. 따라서 윤치호의 진짜 고민은 이 네 번째 입장에 속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리더쉽이 부족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김용직 교수

그의 말을 살펴보면 솔직한 부분도 있으나 일기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감추고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음. 계급적으로도 너무 귀족적이지 않았는가라는 평가가 가능함. 그 자신 편견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단적으로 그 당시 신문들이 사실보도를 할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그가 동아일보를 비판한 것을 들 수 있음.

 

김석근 교수

윤치호의 생각에서 기독교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상당함.

 

신욱희 교수

그의 현실주의적 시각에는 부분적으로 동감이 되지만, 조선이 교육으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데 반해 일본은 과연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라는 언급이 없고, 내적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외적인 요소는 '기회'로 정리해 버림.

 

하영선 교수

윤치호의 일기를 읽을 때, 윤치호의 눈으로 당시를 본다는 의미와 일정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의 시각으로 그 시대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 예를 들면 위에서 말했던 네가지의 부류에 대한 그의 인식,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볼쉐비즘에 대한 정확한 인식 등이 그의 편견있는 시각 속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음. 그 당시의 독립운동을 외교론, 무장투쟁론, 준비론으로 정리한다고 할 때 그 잣대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의 식민지 연구는 위의 세 입장 중 어느것을 견지하고 있는가를 따져보아야 함.

 

김용직 교수

일본 국내정치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상태. 일본은 당시 '치안유지법'으로 자유주의 사상을 말소했고 일본 국내에서도 일본의 장래를 예측하는 목소리는 찾기 어려웠음. 105인 사건 당시 윤치호는 제일 마지막에 출옥했으며 그때 받았던 고문이 모종의 '숨겨진 의식'으로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하는 느낌. 1925년 이후 정간된 사설의 수가 반감되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음. 1920년대는 국내적으로 조선일보가 동아일보를 대신하여 민족주의적인 논조를 보이는 것. 공산주의 운동이 발흥하기 시작한 것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의열단과 독립군의 활동이 가장 중요함. 20년대의 분위기는 조선이나 일본 모두 미묘한데 폭발적인 요인과 문명개화적인 요인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파악됨. 일본도 당시 대정민주주의와 파시즘의 성격이 함께 드러나고 있음.

 

손   열 교수

그의 나이 60세 정도면 그가 가지는 이러한 입장은 당시로서는 별다를 게 없지 않은가?

 

하영선 교수

그가 말하고 있는 식민지 지배의 어조를 생각해 보면 윤치호의 변절은 30-40년대만 해당되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김용직 교수

'모든 권력은 신에게서 나온다. 현세의 권력에는 대항하지 말라'는 보수적 기독교의 양검론적 관점을 미루어 볼 때 윤치호의 기독교 사상을 보다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음. 기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이상재의 경우 윤치호와 다르게 행동했기 때문에 이 또한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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