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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교사연구회 2020년 10월 정례모임
 

2020-10-10 

한국외교사연구회 202010월 정례모임

일시: 2020.10.10.() 3:30pm

장소: 동아시아연구원(EAI) 대회의실

 

1.    세미나 주제 및 독회자료

1. 김종학. "강위의 연행과 대일정책의 전환(1874-1876)"

2. 김종학. "‘개화의 수용과 근대 정치변동(1876~1895)"

3. 강위.《북유속담초(北游續談草). 김종학 역

4. 강위.《북유담초(北游談草). 김종학 역

5. 강위.《심행잡기(沁行雜記). 김종학 역

 

2.    토론 내용 정리

가.   발제

1.     개화의 수용과 근대 정치변동

자세한 내용은 독회자료를 참고

l  그간의 근대사는 대체로 개화 vs 수구라는 관점에서 서술되어 왔음. 하지만 당시 개화사상은 파편화된 형태로 존재했고, 그러한 모습이 당시 분열된 조선사회를 극명히 보여주고 있음.

l  개화의 국내 수용 과정은 1876년부터 1884년까지의 도입기와 1894년 이후의 정착기로 구분할 수 있음. 1898년 횡성신문에서 개화가 처음 정의된바 있는데, 이는 개화라는 말이 처음 들어온 시점이 아니었음. 개화 사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행했었고 당시 횡성신문에서 사용된 정의는 경쟁하던 여러 해석들 중 하나였음.

l  개화는 일본에서 수입되었음. 하지만 단일한 의미로 쓰이지 않고 다양한 정치세력으로부터 다양한 형태로 사용되었음.

l  일본은 조선 정책의 명분을 개화사상에서 찾았음. 당시 서구세력들이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명분을 일본도 똑같이 조선에 적용시킨 것임. (추후 1883년 김옥균이 (자청) 개화당의 대의명분을 후쿠자와 유키치의 개화/문명화 사상에서 찾음, 즉 정변 이후 개화가 수용된 것이 아니라 정변(갑신정변, 1884)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으로 개화가 사용되었던 것임.)

l  하지만 정변의 준비과정에서도 일본의 개화에 대한 이해와 김옥균 개화당의 개화에 대한 이해가 각기 달랐음. 후자의 관점에서는 민씨 수구파를 제거하고 신정부의 수립을 정치개혁의 의미로 간주. 일본세력의 진출/침략을 계기로 개화관을 현실에서 구현하려 했던 것임.

l  동학농민운동 등 민중의 입장에서 개화는 처음부터 반감의 대상이었음. 1895년 단발령 및 을미사변 이후에 특히 더욱 반개화적인 양상을 보임.

l  윤치호의 일기에서 등장하는 개화라는 말은 1884년 정변 실패 이후 반역과 동의어로 인식 되어 사라지게 됨. 그러나 10년 후 개화라는 말이 다시 부활하게 됨.

l  개화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충격이 필요했음. 그것이 1894년 갑오개혁과 청일전쟁이었음. 고종실록에서 일본식 문명개화의 의미로 개화라는 단어가 직접 사용된 첫 사례는 1894724일자 기록임. 당시 고종에게 일본의 공사가 개화를 강요하는 상황이었음. 그러나 여전히 개화의 의미는 정치세력에 따라서 달리 이해되고 정의되었음.

l  갑오개혁의 목적은 왕실과 정부의 권한과 기능을 구분하는 것이고, 신분제도를 철폐하는 것이었음. 1894년 갑오개혁의 개화당은 대부분 문과를 거치지 않은 중인서얼무반향반 출신 중심으로 구성되었음. 이들은 갑오개혁 이후로 신분 상승과 벼락출세의 기회를 얻게 됨. 이사벨라 비숍은 당시 국왕의 처지를 급여 받는 꼭두각시에 비유함.

l  그동안 19세기 조선 근대정치사는 근대지향적인 개화사상이 수구세력을 물리치고 역사 속에서 구현되는양상으로 설명되어 왔음. 그러나 개화의 수용 양상은 개화 사상이 근대사를 이끈 주된 동인이 되기보다, 그 반대로 근대적 언어가 그 수용과 동시에 굴절되고, 파편화되는 과정에 가까웠음.

l  개념사는 정치사와의 연계가 필요함. , 독특한 개념의 수용과정을 설명하는 정치사를 함께 볼 필요가 있음. 기존에는 이러한 과정을 잘 설명하지 못해왔던 것 같음.

l  개화 민족주의 vs 반개화민족주의(저항민족주의)

 

2.     강위의 연행과 대일정책의 전환

자세한 내용은 독회자료를 참고

l  강위는 두 차례 북경을 다녀오며 당시 중국의 고위엘리트와 필담한 기록을 <북유담초><북유속담초>로 정리함. 두 가지가 조선의 외교전략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임. 이건창과 박규수가 그 문서를 열람했음.

l  1차 연행(1873-74) <북유담초>에서 청나라 예부상서의 견문(일본과 서양 오랑캐가()’를 취하면 같이 예로 대하고 설령 예를 무시해도 이쪽에서는 예로 거절해서 절대 사단을 빚지 말라’)이 강화도조약 체결 전까지 영향을 미쳤음.

l  특히 박규수의 대일정책이 1874811일을 전후로 급격한 전환을 보임. 일본에 대한 위협인식이 크지 않았던 이전과는 달리 811일 어전회의에서 박규수는 대일교섭의 실무자들을 처벌하고 일본과 국교단절을 외교적으로 해소할 방법을 모색함. 박규수가 대원군에게 보내는 서한 중에도 1868년 서계 문제의 발생원인을 정리하고 타협이 가능한 문제라고 설득하기 시작함. 마침 당시 일본측에서도 조선과의 국교재개를 위해 외교적인 접촉을 시도하고 있으니 부산에서 교섭의 실마리를 찾자고 제안함.

l  서계 접수 주장은 당시로서 조선에게는 매우 현실적인 판단이었음. 막상 일본이 쳐들어오면 맞설 힘도 없는데도 안일했든 조정 대신들의 태도와는 달리 박규수는 현실적인 고민을 했던 것.

l  <북유속담초> 전에 <설문담초>이라는 글에서는 국제정치에는 정의가 통행되지 않고 국제정치는 힘의 논리에 따른다는 현실을 조선인들에게 알리려는 강위의 의도가 파악됨.

l  <설문담초>에서 강위의 4가지 의문점은 다음과 같음. (1)아편전쟁 때 중국이 정()론을 따랐는데도 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는 전례 없는 재앙이었음. (2)북경사변 당시 중국의 장군이 사용한 병법은 당시 병법으로 가장 이상적인 전술이었는데 실패한 이유를 모르겠음. (3)서양을 오랑캐로 부르면서 중국의 자제들은 미국에 유학을 보내는 이유를 모르겠음. 강위의 표현에 의하면 정인이 비정을 행했으니 이해할 수 없다.’ (4)아편무역을 1858년부터 중국이 시작했는데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이었음. , 중국은 정도를 추구하면서 이단을 풀어놓았으니이해할 수 없다는 것임. 위 질문들은 이미 10-20년 전에 일어난 사건들로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사건들에 관한 것이었음. , 사건의 사실관계를 질문하는 것이 아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임. 강위는 왜 중국은 더 이상 ()’을 따르지 않으며, ‘()’을 따를 때마다 실패하였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음.

→  ‘()가 아닌 방법으로 사느니 도()를 지키면서 죽는 게 낫다고 하는데, (강위)는 도()가 과연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강위는 ()’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역전시키는데 이르렀음

l  결국 강위는 일본과의 전쟁과 강화 두 가지 해결책 사이 가령 비윤리적인 선택이라 해도 명분을 버리고 생존을 도모하는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함.

l  강화도조약의 체결은 전쟁을 피하려는 목적을 가진 강위의 근대적 외교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음. , 대일수교의 시작과 개화의 출발점이었던 것.

 

나.   토론

l  강위는 누군가? 당시 이건창은 북경을 부사로 방문했던 사람이고 강위는 당대 조선의 3대 시인이었는데 이건창하고 친분이 있어 당시 이건창의 부탁으로 따라갔던 것임.

l  Douglas Howland에 의하면 일본에서 ()’을 교화시킨 방법은 위계적이었음. ‘교화시키는 자유라는 아이러니인 것.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에는 정태적 의미와 동태적인 의미가 있는데 조선에서는 개화가 동태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 할 수 있음. 계몽이나 개화의 주체와 대상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됨. 개화의 중심세력이 누구고 선전하려는/선동하려는 대상이 누군지 생각해보게 함.

l  당대의 개념사상을 스펙트럼으로 병렬시킨 것이 흥미로움. 보수적인 왕실의 입장에서는 기득권을 지키는 경장의 개념을 개화로 보았고, 개화에 대한 중민의 이해는 심우, 급진적 해석이 개화. 한편 천민은 개화에 반대했음. 이를 반개화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스펙트럼상으로 볼 때도 좀 더 생각해볼 일임.

l  얼마 전 Foreign Affairs에 올라온 Michael Beckley“Rogue Superpower: Why This Could Be an Illiberal American Century” 글을 참고하면 오늘날 한국도 개화기 조선이 처한 상황과 유사하게 자신이 기존에 알던 미국 주도 liberal hegemony 세계질서가 미중경쟁의 illiberal hegemony 질서로 변화해가는 상황에 직면해 있음.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국내정치도 과거와 같이 단순한 친중-친미 논리로 경쟁하고 있는데, 변화하는 현대국제정치체제, 21세기의 개화를 빠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

l  1873-74년 조선에서는 조만간 닥치게 될 전쟁 얘기를 많이 하고 있었음. 당시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들은 전쟁위협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전쟁의 임박함과 국제정세의 변화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는지?

당시 일본이 대만을 침공하고 조선을 노릴 것이라는 정보가 있어서 조선에서도 긴장이 고조되었음. 그러나 청나라가 일본에 대해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문제가 해소되었고. 그 이후 박규수는 현직에서 물러나게 됨. 하지만 대만위기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는데 조선 조정은 안심을 하고 있었음. 그러나 박규수가 현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부산에서 일본과의 교섭 가능성이 사라져 결국 운요호 사건(1875)이 벌어지게 된 것임.

중국은 조선이 배훼()여론이 강해서 개방 외교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 한편 중국이 조선의 보호자가 되었는데 조선은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경험이 있으니 이런 조선이 또다시 서양세력과 섣불리 전쟁하면 자신들이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을 우려하여 조선을 회유.

당시 일본에는 정한론 정변으로 내분이 있었음. 군벌들도 하야하고 군대 정비가 안되어 있던 상황에서 당시 일본도 현실적인 판단을 했음. 즉 조선을 침략한다면 청나라가 개입할 수 있음으로 섣부른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판단. 이에 메이지 일본은 조선과 외교적인 성과를 통해 대외적인 위신도 제고하고 내부적인 정한론도 잠재우려고 했음. 그런 목적으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처음으로 천황의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했는데 이를 조선이 반대했음. 당시에는 조약체결에 대한 언급은 당시에 없었음. 국내 연구 분위기는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에 대해 당시 조선이 국제정세에 무지했다고 몰아가는 분위기인데 일본의 기만에 가깝다고 평가해야 할 문제라고 봄(발제자 의견). 천황의 사절단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의 명분은 운요호 사건의 시비를 가리고 과거 서계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었고 조약 얘기는 일체 없었음. 1차 회담 때 제안된 어젠다도 상기 동일했음. 그런데 2차 회담에서 일본이 갑자기 이런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으려면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음.

l  이번 발제는 개화사상 연구에서 지녔던 개화사상의 신화/허구성을 지적하고, 당대 조선의 국내정치와 외세와의 관계에서 개화를 두 개의 잣대에서 보고 있음. 흥미로운 것은 북한 김일성도 50년대 김옥균에 대한 재평가를 시작함. 개화파의 친외세적반인민적인 모습을 알면서도 김일성은 왜 19세기사를 재구성하는데 김옥균을 재평가하는가? 동주(이용희)사학도 개화의 허구성을 지적했는데 발제자의 의견과 같으면서도 다름. 저항민족주의/개화(계몽)민족주의를 보고자 한다면 잣대는 2개가 아닌 3개의 잣대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 국내와 국제정치 잣대뿐만 아니라 문명표준이라는 시점(3의 싸움)에서 19세기를 보아야 하지는 않은지. 일본에서는 ‘civilization’문명개화로 번역하는데 조선은 문명개화를 붙여서 잘 안 씀. 83년 한성순보에서도 문화문명등의 표현을 몇 번씩 번갈아 사용하는 그 주저함을 보면 개화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몰랐던 것임. 문명개화라고 쓰면 누구의 문명으로 과연 개화를 하겠다는 것인지? 따라서 과연 19세기 개화의 수용에는 국내 권력의 장악만 목적이었는지, 3의 싸움이 있었는지, 세계의 잣대로 19세기를 복원하는 작업을 해볼 수 있음.

→ 3개 잣대의 평가 비율을 어떻게 할지도 중요한 질문임. 과연 단순한 국내정치 승리(권력욕)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여서 정권을 장악하려 했던 것인가? 혹은 넓은 의미의 개화를 위해 외세를 활용하려다 되치기로 당한 것인가? 똑같은 결과에 대한 얘기이지만 뉘앙스가 다름. 후자라면 이들의 개화모델을 만들어야 함. 현대 한국에서 정치권력 간의 싸움도 무엇을 위한 여야싸움인가?

나아가, 3의 싸움을 문명표준싸움이라는 표현보다는 애국민족주의라는 표현은 어떨지?

l  유길준(그 사람의 됨됨이를 떠나서) 서유견문 14편에서 쓰고 있는 문장은 ‘great debate’가 필요하다는 것임. 서유견문 14편에서 말하는 개화의 등급에는 (1)주인, (2)손님, (3)노예가 있고, 실상의 개화와 허명의 개화라는 개화에 대한 태도로는 개화의 (1)죄인, (2)원수, (3)병신으로 구분됨. 결국 이들의 결합이 필요한 것인데, 오늘날 이들 개화의 3인은 누구인지, 그리고 결합은 어떻게 시킬지가 시대적인 과제.

l  일본과 국제정세에 대한 박규수의 인식 변화에 대해서도 좀 더 연구가 필요함. 박규수를 개화사상가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는 척사파도 아님. 박규수는 해국도지의 발상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사람임. 박규수가 74811일 이전까지는 어전회의에서 척사발언을 하다가 이후로 급변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박규수 개인의 사상과 관료적인 발언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음. 우의정의 위치에서 공적으로 할 수 있는 발언과, 사적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상황적인 고려가 필요함.

l  자강균세가 문명표준일 수밖에 없고, 생존전략의 기존모델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사고가 본격적으로 조선에서 받아들여진 전환 시점을 언제로 두어야 하는지,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숙제임. 그 실마리를 강위나 박규수에서 찾을 것인지? 그간 사학계로부터 임의로 다뤄지고 설정되어 왔는데 한국의 외교사/국제정치사는 국제정치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숙제임.

l  저항민족주의의 맥락을 살펴보자. 개화의 수용 과정에서 동학은 개화에 저항했음. 이후 일제시대에서는 의병이 저항했음. 그런데 동학과 의병을 하나로 볼 수 있나? 동학잔당은 일제를 거쳐서 반대로 개화로 전환했음. 그럼 천도교하고 동학은 어떻게 연속성을 지니나? 북한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이 천도교 계열이었음. 저항민족주의는 식민국가에 대한 저항과 왕조국가에 대한 저항을 같이 포함하고 있음. 그러나 의병은 반대로 왕조에 대한 저항은 없다는 점에서 의병과 동학을 하나로 보긴 어려움. 요즘 세대에서 죽창부대라는 단어가 용감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19세기의 정의가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

 

다.   기타 사항

l  한국고등교육재단 학회 지원이 종료됨. 대안이 있다면 제안 바람.

l  새로운 연차 프로젝트 제안: 다음주 이헌미 박사님 발제 이후 결정할 내용이지만 글로벌 히스토리의 맥락에서 동아시아와 한국을 볼 것.

그 동안 했던 작업은 현대IR로 과거 대외관계사를 보는 것을 탈피해서 동아시아의 조직원리에 맞는 한국중심의 지역외교사/대외관계사를 보는 것이었음

이제는 한국중심의 역사(national history)가 세계사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가지는지를 보고자 함. 동서양의 글로벌히스토리의 맥락. 앞으로는 글로벌 폴리틱스의 시대. 앞으로는 전파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교섭사나 우리의 상황을 같이 볼 필요가 있음. 우리의 역사를 글로벌한 시각에서 해석.

예컨대 삼국시대도 비교제국사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음. 한편으로는 comparative 한편으로는 integrative한 부분이 있음. 조공은 터키에도 있었고, 즉 비슷한 시기에 보편 universal history로 있었던 것. 같은 시대의 글로벌을 잘라서 보면 변형과 비판적인 상이 있을 것. 저발전, 독재, 혁명, 진보 등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있으면 그게 다른 지역에서는 같은 시대에 어떻게 등장했는지.

참고: Erez Manela <Wilsonian Moment: Self-Determination and the International Origins of Anticolonial Nationalism>, <Asia in the Global 1919: Reimagining Territory, Identity, and Solidarity>

l  다음 모임은 1126() 6EAI 대회의실에서 진행. 도시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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