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교사연구회 2018년
05월 정례모임
일시: 2018.05.19.(토) 2:30-5:00pm
장소: 한국고등교육재단 18층 회의실
1.
논문
발제 및 토론
<사조선록 역주 2: 명사의 조선 사행록 1>, 예겸·장영 저, 은몽하·우호 편, 김한규 역 (소명출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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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요해편> pp.92-223 – 노가연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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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해편> pp.223-351 –
주연정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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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당정정방주선생봉사록> - 신수정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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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선 마무리 발제
2. 토론 내용 정리
n 창화외교: 예겸 <요해편> 2권, 장영 <황화집>의
시문들이 기존의 사료와 달리 어떠한 새로운 것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이들의 시 ‘battle’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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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해편>을 시작으로
몇백 년간 비슷한 형태의 ‘창화외교’가 20여 차례 이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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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조-명 문인 두 사람 이상의 공저가
이루어진 것으로, 한중 공조로 쓴 책이라는 복잡한 의미를 갖는 사료가 됨 – Sixiang Wang의 박사학위논문 참조 (조명관계는 단순히 전통적인
의미의 사대주의로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쌍방에 의해 co-construct)
n 이러한 ‘창화외교’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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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국에서 평가하기를 ‘조선은 한문은
잘 하는데 말(통역)은 신통치 않다’ - speaking language와 다른데도 불구하고 조선이 상당한 수준의 문필력을 갖추었던 것 – 종래에 환관·무사 출신의
사신이 왔을 때와는 달리 예겸 때에 예외적으로 문사가 사신으로 오자 한문으로 화답할 수 있는, 겨룰
수 있는 대상을 만나게 된 것
n 시를 쓴 저자들에 대한
해석학적 리딩이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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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 조선의 문인들이 예겸에게 보이는 과도한 저자세 또는 모화사상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디까지가 identity-sharing이 이루어진 것이고 어디까지가
외교적 언사인가? 당시 이들의 심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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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시에서 상호 간에 절절한 감정 – 어디까지가
제스쳐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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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제3자들이 예겸과 <요해편>을 어떻게 보았는가? 서거정 <필원잡기>, 성현
<용재총화> 등 참조 – 신숙주 <보한재집>, 성삼문
<매죽문헌집> 등에서는 예겸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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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에서 사용되는 당시의 공간개념 용어는 선진시대부터의 천하질서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음
n 기존연구의 한문학,역사학과 다른 국제정치학의 입장에서 주목해야 할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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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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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관계는 조공관계의 prototype이라고
일컬어지나, 사대주의 이상의 무엇이 있었는가? 15세기 초
새롭게 태어나는 조명 천하질서는 어떻게 구성되고 있었던 것인가?
n 정치사상사의 ‘linguistic turn’과 ‘empire turn’을 상기시킴. 그런데 외교학에서는 ‘외교적 수사’의
문제가 있어 문제가 복잡화되는데, ‘말의 국제정치’를 읽어내는
법을 보여주는 선행연구가 부재함
n 임진왜란 기준으로 조선
전기와 중후기의 조중관계에 뚜렷한 차이가 있었음. 중후기에는 ‘재조지은’으로 인해 숭명의식이 이데올로기화. 그러나 장영 <봉사록>에서 명에 대해 조선이 오히려 당돌한 모습, 힘의 비대칭성을 언어를 통한 대칭성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음.
n 이렇게 시를 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배경이 그만큼 태평성대로 외교적 긴장이 없었기 때문인가? 예겸의 시기에는 장영 때와
같은 여진족 문제가 없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