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교사연구회 2017년
12월 정례모임
일시: 2017.12.16.(토) 2:30-5:00pm
장소: 한국고등교육재단 18층 회의실
)
1.
<동아시아
천하질서와 한국의 생존전략사> 초고발표회
전재성 | 고구려의 제국 체제 정비와 대외전략: 광개토왕대 및 전후 시기*
김수암 | 648년 당 고종의 璽書에 나타난 국제정치: 7세기 동아시아질서와
백제의 대외전략상의 함의
이헌미 | 7세기 신라의 삼국통일과 한중외교
김봉진 | 장보고의 교역 네트워크와 동아시아 지역 질서
전재성 | 서희의 거란 외교와 고려 초의 대외정책*
하영선 | 려송복교의 국제정치학: 천하다국질서와 고려문종의 태평외교
손병권 | 1595년 조선의 신충일 건주여진 파견: 명,여진,조선 간의 국제적 역학관계를 중심으로
김현철 | 조선후기 북벌론의 전개와 대중국(淸) 인식의 변화
(*
원고 제출)
2. 토론 내용 정리
v 향후 진행 사항
n 책 전체 제목인 <동아시아 천하질서와 한국의 생존전략사> 을 유념하여, 특히 서론과 결론을 target audience를 고려하여 작성
n 2017.2.28.
최종원고 제출 – 3월 학술회의 추진
v 김수암| 648년 당 고종의 璽書에 나타난 국제정치: 7세기 동아시아질서와 백제의 대외전략상의 함의
n 구당서의 <새서>는 문건 자체를 인용하는 것 만으로도 큰 의미 있을
듯
n 백제라면 당,왜와의 관계가 주목이 되는 나라. 왜와의 관계, 예를 들어 백강전투 등도 다룰 것인가?
-
시기적으로 백강전투는 다루기 어려울 듯
-
수나라에서 돌아가던 왜 사신의 국서 탈취 사건 –
수와의 관계에 있어 백제-왜가 항상 우호적이지는 않았고 소원해지기도 했다는 점에 대한 정리가
동반되어야 함
-
이런 방면에서 일본학자들의 연구 참고 필요
v 이헌미 | 7세기 신라의 삼국통일과 한중외교
n 당이 취하는 다양한 전략의
유형들: 화친요구,정벌,압박
등 – 삼국간의 세력 재편에 대한 당의 대응 – 나당연합의
밀약은 왜 지켜지지 못하고 전쟁으로 갔나가 중요한 실마리가 될 듯
n 당나라 입장에서는 삼국이
나누어져 싸우는 게 좋지 않았나? 신라가 삼국통일의 뜻을 비쳤을 때 당이 우호적으로 보았을까?
-
640년 정도까지는 그랬으나 640년대
후반에 전환됨. 다양한 전략을 원용하여 영향력을 조절하였으므로 삼국분립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n ‘번속’의 명확한 개념 정리가 필요함: 정벌-기미-회유-예치 순이라면
번속의 위치는 어디? 예치적 번속?
-
‘기미부주’와 ‘기미’를 구분 – 기미의
간접통치 형태에서 기미부주는 수당 시대에 제도화된 형태.
-
국내적/국외적 기미/번속 – 만국공법에서도 조공국/번속/번방을 구분, 분명히 구분되는 인식이 있었음 – 그러나 통일되지 않는 개념이기도 함 – 현 중국학자들의 논의대로
백제/신라는 번속으로 위치시키면 안됨 – 그걸 우회적으로
깨려는 의도
n 명의 경우 조공국/번속에 위소를 설치하여 조공을 관리하였음
-
조선도 ‘조공’, 여진,몽골,만주도 ‘조공’ 관계였지만 후자가 전자보다 가까운 관계
-
그 중에 몽골은 청나라와 대등 관계, 명으로부터는
‘칸’ 임명됨
-
조선은 청사고에서는 <속국전>, 명사에서는 <외국전>에
수록 – 청나라 때 속국/속방론의 확장
n 김봉진 교수의 조선 속국/속방론 논고 공유 예정
v 김봉진 | 장보고의 교역 네트워크와 동아시아 지역 질서
n 국가는 제도화 될수록
경직됨. 장보고가 있었던 당나라 때에는 지방 통제가 부실했던 반면, 장보고
사후 그와 같은 인물/네트워크는 다시 태어나지 않았음
n 장보고가 시대를 뛰어넘는
네트워크를 장악했다면 라이샤워 설명 대로라면 없어진 게 너무 허망하지 않나? 청해진-다자이후를 아우르는 네트워크의 거점,인맥이 마련된 것인데, 장보고 개인의 것이라서 사망 후 네트워크가 죽었다?
-
그에 대해서는
사후 추적이 필요함 – 장보고 사후 당도 신라도 망했고, 장보고와
같은 무역상들이 많이 존재했음
-
당시 한중일의
시공간 개념에 비해 뛰어난 시공감 개념을 가졌음에 spotlight – 장보고의 안목의 impact는 무엇이며, 장보고 사후 소멸되었는가?
-
예를 들어
왜구들의 transnational한 공간 개념에 비해, 적어도
해상에 있어 (한국)의 공간개념은 움츠러 들었음 – 대륙적으로는 조공체제만 해도 좁은 공간은 아님
n 한국은 대륙국가적 사고에
익숙함. 일본 쪽의 해양쪽 시각 연구와 평가가 충분치 않은 장보고 사례의 소개가 유의미함.
v 하영선 | 려송복교의 국제정치학: 천하다국질서와
고려문종의 태평외교
n 비슷한 시기를 다루는
전재성 논문과의 차이
-
전 교수의
논문은 페어뱅크와 로사비 중 이 시기는 로사비가 더 적합하다고 보는 반면 본 논문은 둘을 합친 ‘천하다국질서’에 초점
n 고려-송 관계에서 ‘예치’의
본질은? 전략적 언어로 재해석할 수 있는 것 (e.g. 소동파)? 현실주의,실리주의적 고려를 빼고 예치의 본질이 있는가? 현재의 언어로 설명한다면? 고려의 생존전략에 어떻게 도움을 주는가?
n 당시의 operating system이 복합성이었다면 그것을 파악한 국가가 이득을 보았을 것. 19세기의 경우 서양은 하드파워적으로, 우리는 소프트파워적으로 대응해서
헛짚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음. 하드/소프트 이분법적으로 개념화를
하고 시작하면 결정론적으로 갈 위험이 있으므로, 본고는 3분법을
주장함.
v 손병권 | 1595년 조선의 신충일 건주여진 파견: 명,여진,조선 간의 국제적
역학관계를 중심으로
n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사교를 금해놨음을 알면서도 왜 조선과 통교하고 싶어 했나?
-
기존 답변들은
세 가지: 1) 건주여진이 해서여진을 격파하고 내부적으로 ‘여진의
대표’를 천명하기 위함, 내부적 정당성 2) 조선과 대등한 관계 3) 물자교류를 위해
-
여기서 1),2)가 중요하고 3)은 아닌 듯함. 중국과도 교류가 충분했기 때문.
n 누르하치의 조선에 대한
통교 요구: 다른 여진-조선 관계와 달리 건주여진-조선 관계는 매우 ‘약한 조공관계’라서
대등한 관계를 요구할 여지가 있었음
n 국제질서가 급변하는 시기에
누르하치의 복심은? 페어뱅크/로사비 한 시각만으로 볼 수
없음
v 김현철 | 조선후기 북벌론의 전개와 대중국(淸) 인식의 변화
n ‘義’(명분)으로서 북벌, ‘利’(효용)으로서 북벌, 그리고 ‘力’(군사력)으로서 북벌의 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