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교사연구회 2016년
12월 정례모임
일시: 2016.12.17.(토) 3:30~6:00 pm
장소: 한국고등교육재단 18층 회의실
1.
독회자료
및 발제
1) 전재성 발제: 고려시대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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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정임, 고려-거란 '30년 전쟁'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동북아역사논총 34, 2011.1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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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민, 10~12세기 하생신사 파견과 고려-거란 관계, 역사와 현실 89, 2013.9, 7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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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환, 993년 고려-거란 갈등 및 여진 문제, 역사와 현실 85, 2012.9, 259-303
2) 하영선 발제: 고려시대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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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co
E. Breuker, Koryo as an Independent Realm: The Emperor's Clothes?, Korean
Studies, Vol.27, 2003, 4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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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호,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자관과 해동천자, 한국사연구 105, 1999.6, pp.3-40
3) 김준석 발제: 고려시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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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현, 원말명초 조선-명의 요동쟁탈전과 국경분쟁 고찰, 한일관계사연구 42, 2012, 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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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현철, 고려말기 사대부의 대외관 - 화이론을 중심으로 진단학보 86, 1998, 7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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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희, 조선초기의 사대론, 역사교육
64, 1997, 1-33
보조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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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익, <고려후기 외교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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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범, <중종의 시대: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 3, 4장
2.
토론
내용 정리
1) 전재성 발제 후 토론: 고려시대 전기
n 발제에서 여진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지적했듯, 명청교체기의 ‘조-명-청관계’처럼 한반도
왕조와 중원 왕조 간 관계에서 제3자에 대한 고려가 항상 개입됨을 알 수 있음. 신욱희 선생의 ‘삼각구도’가
유효함. 완충정권, 다자관계의 존재여부도 중요함. 단극/양극구도를 비판하는 새로운 구도를 그려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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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이를 전쟁의 빈발성과 연결, 단극/양극/다극체제가 변화하는 시점에 전쟁이 많이 발발하는지, 왈츠적 양극체제의 안정성이 동아시아에서는 정반대로 드러나는지 확인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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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 한계, 보급의 한계 때문에 전쟁이
종결되는 측면 – 완충정권의 존재여부와도 연결됨
n 5대10국 시대가 계속되면서 예에 기반한 세계질서 인식이 약화되었을 것인데, ‘송과
잘지내야 한다’는 인식이 얼마나 강했을지? 조명관계에 비하면
고려사람들은 명분에 얽매이기보다 비교적 현실적이었던 것으로 보임
n 이 시기가 타 시기에
비해 특징적인 점은 위계(hierarchy)보다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 가능했던 시기라는 점. 이에 기반한 당대인들의 전략적 사고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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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균형이나 anarchy적 상황이 간헐적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세력균형을 실행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각 행위자가 ‘기회’를 이용하지 않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음. 곧, ‘embed된 전체 흐름은 위계’라는 의식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임. 예를 들어 고려가 송에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파병하지 않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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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1차자료
연구가 필요함
n 연구 주제/사례: 여송단교 시기 거란에 조빙하게 되는 전쟁, 서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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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서희에 관해 국제정치학 측면에서 쓰여진 기존 논문이 많지 않음 (*김기홍, «서희, 협상을
말하다»
2) 하영선 발제 후 토론: 고려시대 중기
n 우리 책 전체의 메시지는
‘역사상 한반도인의 생존전략’, ‘중진국 외교의 역사적 연원’ 등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음
n 연구 주제/사례: 려송복교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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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때문에 고려-송이 단교(1031)했다가 복교하게 되는 고려 문종의 선택 (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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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단교와
복교 사이 당시 고려의 이중적인 내면세계 및 전체 시스템의 구조를 파헤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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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의 상소문 중 <고려오해론>(1093) 또한 1071년 려송복교와 밀접한 관련
n 당시 당나라의 기본 기조는
‘연여제요(고려와 손잡고 요를 견제)’였으나 내부에서는 소동파(구법파)
vs 왕안석(신법파)이 대립하고 있었음. 곧, 당대의 액터들이 실제로 다양하게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국제질서를 Waltzian 적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음
n 이 시기의 ‘위계hierarchy’라는 것을 조선시대의 화이적 천하관까지 연결되는
규범/이념으로 보아야하는가, 국가들 간의 ‘평형’으로 보아야 하는가?
n 본 작업의 ‘국제정치학적인 포인트’는 정확히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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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과 행태 사이의 괴리 (예: 화이론적 천하관에 다원적 외교행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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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지표를 포함한 사료를 파악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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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계가 주로 주목하는 대상은 호칭,의상,천하관 등 표피적,자기선언인 측면이 있으며 (우리가 볼 것은 책봉 칭호 등 좀더 상호적인 지표), 당시 정세
속에서 고려의 생존전략 등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지 않은 듯 (*Peter Yun: 역사학자가 국제정치학
이론을 도입, 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으로 11세기
고려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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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현재 미국의 국제정치학 보다는 복잡한 프레임이 요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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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IR적 논의를 가져가야 할 것도
있지만 일정 부분은 버려야 할 것. 사료분석을 통해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3) 김준석 발제 후 토론: 고려시대 후기
n 연구 주제/사례: 원-명-고려/조선 간의 각축, 고려/조선의 요동진출
n 이 시기는 로사비나 페어뱅크의
프레임이 아닌 ‘제국 내의 통치’로 해석되어야 함. 고려-몽골 관계는 몽골제국 전체 관점에서 보아야한다는 것이 현 학계의
흐름임
n 몽골 제국과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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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 내에서 고려의 특별한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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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세론적 화이론’과 ‘종족론적 화이론’, 곧 ‘힘에
따른 사대’와 ‘한족에 대한 사대’의 틀로 연구해볼 수 있음. 명나라가 건국하자마자 공민왕이 기다렸다는
듯이 명과 손을 잡았는데, ‘여명개교’를 사례로 설정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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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몽골 간섭/지배기처럼 외세가
깊숙히 들어온 사례가 없었음에도 끝난 뒤에 우리의 개체성은 그대로 살아남았다는 점. 일제강점기 때에도
일본 지배가 1-200년은 지속될 것이라는 예측들이 있었는데, 고려시대에
원의 지배에 대한 내부적 고민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의견은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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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원나라만 기미 등의 정책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지배를 했는가? 왜 중국 본토 역시 직접 지배를 했음에도 가장 한화(漢化)되지 않은 이민족 왕조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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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제국의 성격에 대한 영미권의 논의를 참고해볼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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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vs ‘몽골’ 명칭의 문제: 전자는 한족 왕조 계보에 편입되는 명칭. ‘몽골’의 역사는 훨씬 길다
n ‘요동진출’ 문제는 고려 초기와 조선 초기에 반복되는 고민임. 삼국통일 때 당나라가
고구려 고토에 대한 직접 지배를 시도하자 신라가 나당전쟁을 시작했음. 고려-조선의 분기점이 되는 위화도회군 사건, 정도전의 요동정벌론과도 연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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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아닌 국가들’과의
북방국경은 어디였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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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시기 요동지역의 다른 왕조나 단위는 무엇이 있었는가?
n 고려 초기와 조선 초기에
유학과 사대부의 역할을 비교
n 일본 학계에서는 고려가
원과 함께 일본 침략을 시도했던 사례를 많이 다루고 있음. 우리 역사 상에서는 많이 기억되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때나 19세기 정한론 대두 당시에 명분으로 언급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