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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 논평 제2호] 기로에 선 북한
 

동아시아연구원 

2009-08-27 

북한의 김정일 체제는 국제사회의 점증하는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핵선군(核先軍)정치’를 끝까지 사수할 것인가 아니면 체제 보존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온 핵무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비핵선경제(非核先經濟)정치’를 추구할 것인가라는 전략적 결단을 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권력승계가 가시권에 들어온 북한에서 김정일 위원장 이후 새로 등장하게 될 지도부는 김정일 위원장의 전략적 결단에 따라 기회 또는 위기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 포괄적 협상이 동시에 추진될 향후 국면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후계체제의 생존과 번영의 토대를 동시에 마련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한다. 한편 주변 당사국들 역시 북한의 정권 및 국가 안보를 현실적으로 제공하면서, 핵포기와 개혁개방을 유도할 수 있는 국제 환경을 마련하고, 한반도의 항구적인 안보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방안을 구체화해야 한다.

 

1994년 이후 김정일 위원장은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 철회와 핵위협의 해결이 선결될 경우에만 북한의 비핵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이어 받은 국가전략을 추구하였다. 탈냉전의 국제정세 속에서 빠르게 고립화되는 북한은 정권과 국가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서 핵무기 개발을 선택했다. 그러나 북한의 비핵화를 대북정책의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는 미국은 북한의 핵선군정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글로벌 질서를 지탱하는 중심국가로서 이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결국, 체제생존의 최후 보루로서 선택한 핵선군정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북한은 핵선군을 기반으로 하는 강성대국을 건설하는 대신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면서 약쇄소국의 길을 걷고 있다.

 

북한의 김정일 체제가 당면하고 있는 세 번째 갈림길은 과거 1994년과 2003년의 두 갈림길에 비해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김정일 후계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난제와 맞물려서 훨씬 더 복잡하다. 김정일 위원장이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 결단을 하지 못한 채 핵선군정치의 기득권 세력이 새 지도부의 주도세력을 형성한다면, 북한은 ‘핵선군정치’에서 ‘비핵선경제정치’로의 새 길을 쉽사리 선택하기 어렵다. 국제적으로는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국내적으로는 체제적 안정성이 보다 약화되는 속에서 눈앞에 보이는 생존의 마지막 카드를 버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동시에 ‘핵선군정치’의 포기는 새 지도부의 정치적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핵무기를 포기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지도자는 그나마 주체사상의 체현체(體現體)인 김일성 주석의 아들인 김정일밖에 없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비핵화없이 당면하게 될 위기의 심화를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핵무기는 단기적으로 고난을 잊을 수 있는 마취제의 역할을 할 수는 있어도 죽음에 이르는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는 없다.

 

북한이 이제까지 걸어보지 않은 새 갈림길은 핵무기를 포기하고 선경제정치를 추진해서 21세기강성대국을 모색하는 길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비핵선경제정치’를 위한 국내적 기반을 다지고 국제적 노력을 시도해서 ‘비핵선경제정치’의 유훈을 새 후계체제에게 남기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의 체제전환을 의미하는 핵포기에 따르는 위험을 김정일 위원장이 대신 짊어지고 해결해야만 그 후계자가 생존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물론 핵무장을 포기하는 전략적 결단을 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주변당사국들과의 쌍무 그리고 다자적 노력을 통해 체제보장을 다지고 21세기적 경제 번영을 추구하는 길을 하루 빨리 찾아야 한다. 김정일 이후 후계체제가 이 전환을 추진하기보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생전에 김정일없는 선군세력이 새로운 유훈에 동의할 수 있는 정치적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다. 김위원장의 결심과 주변 당사국들의 전략적 협력이 없을 경우, 북한이 ‘비핵선경제정치’의 길을 선택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김정일 위원장의 전략적 결단이 이루어진다면 북핵문제 해결과 함께 21세기적 한반도 평화공존체제 정착을 위한 다양한 논의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북핵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북한이 변화의 발걸음을 한발 먼저 내디뎌야 한다. 북한은 핵무기 포기의 조건으로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과 핵위협의 포기를 주장한다. 그 구체적 표현으로서 주한미군 철수, 한미군사동맹 포기, 아시아 태평양 지역 내 미국 핵무기의 축소 및 재배치 등을 포함하는 핵군축회의 개최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명분이 약하고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체제안보를 담보할 대안도 되지 않는다. 설사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군사동맹을 해체하는 동시에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핵무기를 축소한다고 하더라도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존재하는 한 북한은 여전히 미국의 군사적 보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핵심문제는 북한의 정권 및 국가안보에 대한 확실한 담보를 위해 광범위한 정치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보다 바람직한 생존과 번영의 국제환경질서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이 새로운 변화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북한의 첫걸음에 발맞춰서 주변 당사국들의 노력도 필수적이다. 북핵문제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변화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북한과 미국,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라는 여섯 국가들의 ‘톱니바퀴’가 맞물려서 함께 돌아가야 북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북한이 ‘핵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폐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선비핵화’에 대한 북한 정권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어야 한다. 이러한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을 경우, 북한의 핵선군 주도세력은 자신들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죽는 방법의 선택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북한이 전략적 결단을 통해 자신의 톱니바퀴를 돌릴 경우, 주변당사국들도 같이 톱니바퀴를 앞으로 돌려서 북한의 톱니바퀴가 계속해서 맞물려 함께 앞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주변당사국들은 북한으로 하여금 비핵화의 결과가 체제생존을 위한 최후 수단의 포기가 아닌, 체제생존의 해답이라는 믿음을 주기 위해 북한의 장기적 미래에 대한 비전과 계획을 공유해야 한다.

 

북한의 변화와 상응해서 북한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한국의 첫 노력은 한미 간의 새로운 대응책 마련에서 출발해야 한다. 과거의 포괄적 대안들은 양국의 의견 불일치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8월 15일 경제적 지원과 재래식 무기의 감축을 주 내용으로 하는 ‘한국형 포괄적 패키지’의 모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적 지원만으로는 북핵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실타래를 풀 수 없다. 경제적 협력과 더불어 정치적 · 안보적 측면에서도 보다 포괄적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관계정상화와 체제보장의 문제에서 한국과 미국이 북한에게 제공할 수 있는 내용과 북한의 새 후계체제가 바라는 내용이 상호 신뢰구축의 기반 위에서 합의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그러자면 한미 양국은 북핵문제의 종결점(end point)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전략적 결단을 한 북한과 본격적으로 포괄적 패키지를 추진할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동시에 한미공조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한미 양국과 중국의 공조다. 주변 당사국들 중에 북한 후계체제의 상대적 신뢰가 높은 중국이 적극적으로 포괄적 패키지의 협상과 이행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중국은 한국과 미국이 북한체제의 붕괴가 아니라 핵폐기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확신이 설 때에만 한미 공조체제에 힘을 실어주고 북한에게 핵포기를 설득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21세기 실패국가가 아니라 성공국가가 되도록 돕기 위해서는 6자회담의 관련당사국 모두를 비롯해서 유럽연합 및 국제기구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이러한 복합적 노력을 통해서 비핵화한 북한이 주변 당사국들과 공존공영할 수 있는 미래를 보여줌으로써, 북한이 스스로 비핵화와 번영의 길을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위원장

하영선 (서울대학교)

 

위원

이숙종 (EAI원장, 성균관대학교)

전재성 (서울대학교)

황지환 (명지대학교)

 

[EAI 논평]은 국내외 주요 현안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통해 깊이 있는 분석과 적실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AI 논평]을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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