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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과학의 새로운 방향모색 : 국제정치학
 

2008-03-06 

I. 한국국제정치학의 빈곤

 

한국 근대국제정치학의 첫 출발은 유길준의 서유견문(1887-1889 집필/1895 출판) 이다. 그 이후 지난 120년동안 한국은 전세계 어느 나라도 겪기 어려운 국제정치적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문제의 풍요로움에 비해서 그 해답을 찾아 나선 한국국제정치학은 끊임없이 빈곤을 노래해 왔다. 번역의 국제정치학에서 창작의 국제정치학으로 가자는 “한국적 국제정치학” 의 초보적 논의는 식상하리만큼 원점을 맴돌면서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 역설적으로 한국국제정치학의 국제정치적 식민성은 오히려 심화의 길을 걷고 있다. 그 뿌리는 깊다.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실천론에 대한 철저한 자기 고민의 빈곤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빈곤의 악순환에서 탈출하려면 복합변환(complex transformation)의 21세기를 맞아 새로운 복합세계정치학을 구축해야 한다.

 

II. 존재론의 빈곤

 

한국국제정치학의 출발은 한국인들의 국제정치적 삶에 대한 자기 성찰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반도의 삶은 대단히 국제정치적이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우리는 중국중심의 천하질서 속에서 살아왔다. 19세기 서세동점 이후 한반도를 둘러 싼 열강들의 치열한 각축 속에서 조선왕조는 국망의 비극을 맞이했으며, 일본제국이 구미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해방은 기적같이 찾아왔다. 미국과 소련을 양극으로 하는 전후 냉전질서의 형성과 함께 한반도의 남북한은 세계대전 규모의 한국전쟁을 치른 후 분단 고착화의 길을 걸었다. 20세기 후반의 냉전기간 동안 한반도는 냉전적 삶의 세계전시장이었다. 세계 사회주의질서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1991년에 해체됨에 따라 세계는 다시 한번 변화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다. 단순한 탈냉전의 변화를 넘어서서 지난 100여년동안 힘들여서 받아들였던 근대국제질서와 우리에게 서서히 닥쳐오는 탈근대 세계질서가 뒤범벅된 오늘의 과도기적 현실을 우리는 복합변환의 세기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있다. 21세기 한반도의 삶도 예외없이 복합변환 세계정치의 커다란 영향 속에서 새롭게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복합변환 세계정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21세기 한국정치 분석 그리고 나아가서는 한국사회과학의 첫걸음이다.

 

21세기 세계질서의 복합변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주인공, 무대, 연기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19세기 동아시아에서 천하국가를 물리치고 화려하게 무대의 중심에 등장 했던 국민국가 또는 국민제국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네트워크 국가로의 변환을 모색하고 있다. 국가가 여전히 기본이지만 안과 밖으로 촘촘한 다중심 또는 무중심의 그물망을 치고 있다. 무대도 복합화되고 있다. 19세기 동아시아에서 예(禮)라는 명분 중심의 무대를 무너 뜨리고 등장한 부국과 강병이라는 실리의 단순무대는 21세기에는 3층 복합무대로 바뀌고 있다. 중심층을 이루고 있는 부국과 강병의 무대는 안보, 번영, 문화, 생태균형의 무대로 바뀌고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정보기술의 혁명에 힘입은 지식의 무대가 새로운 기층 무대로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합조종의 정치무대가 상층을 이루고 있다. 주인공과 무대의 복합변환에 따라 연기도 과거와 같은 늑대들의 치열하고도 단순한 약육강식의 생존경쟁 대신에 늑대거미의 3층 다보탑 쌓기라는 복잡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고 있다.

 

한국국제정치학은 우리가 역사 속에서 겪어 온 국제정치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근대 국민국가 또는 국민제국의 삶터 속에서 성장한 국제정치학을 지난 한 세기 동안 뒤늦게 수입하여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온 국제정치를 분석해 보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21세기 국제정치가 다시 한번 복합변환이라는 준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에 한국 국제정치학은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Ⅲ. 인식론의 빈곤

 

복합변환적 삶의 등장은 이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의 등장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21세기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전초전인 개념 논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그 속에서 한국은 3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미래의 변화를 과거의 개념으로 읽어내려는 어려움이다. 오랫동안 중국 천하질서의 명분에 익숙해 있던 한반도는 19세기 중반 문명사적 변환을 맞이하여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 유럽의 근대 사회과학 개념들의 전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국제정치의 경우 근대국민국가의 부국강병 경쟁이라는 기본 개념으로 세계의 지속과 변화를 읽어내는데 간신히 익숙해 진 한국은 21세기의 문명사적 변화의 가능성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새로운 개념들의 전파 싸움을 치르기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전통 개념으로 근대의 변화를 담아야 했던 어려움처럼, 근대의 개념으로 미래의 변화를 품어야 하는 갈등이다.


한국이 겪고 있는 개념 전파전쟁은 시대적 변환에 따른 새로운 개념의 각축에서만 전선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의 전선은 정치 사회 구조의 변화 에서 형성되고 있다. 정치 사회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일차적으로는 국가간에 이차적으로는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다. 개념 논쟁은 근대 이래 국제정치의 중심국과 주변국간의 전파와 변용이라는 틀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부국과 강병의 기반 위에 근대 국제정치의 주인공을 다투었던 유럽의 중심국가들은 의미권의 지구적 확대를 통해 국제질서의 보다 효율적 운영을 추진했다. 21세기 세계정치의 중심국가 위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미국을 비롯한 구미국가들은 세계질서의 복합변환을 품기 위한 새로운 개념들의 전파를 다시 한번 주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전파의 중심국들에게는 이러한 개념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느낌에 잘 맞는 맞춤복이라면, 한국과 같은 전파의 주변국들에게는 이러한 개념들이 기성복일 수밖에 없다. 맞춤복과 기성복의 차이는 단순히 몸매를 얼마나 멋있게 들어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미래의 몸과 머리와 마음의 키워나가는 방향을 결정짓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한국의 개념 논쟁은 국내의 정치 사회세력간에도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다. 전파 중심 국들의 개념들을 받아들여 사용하는 과정에서 국내의 정치 사회세력들은 전통의 무게, 현재의 정치 경제적 이해, 미래의 전망 등의 영향 속에서 각자 다른 형태로 개념들을 변용하려는 노력을 해 왔다. 19세기 한국의 위정척사파들은 가능한 한 전통 개념으로 폭풍처럼 불어 닥치는 근대의 변화를 품어 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개화파들은 일본과 중국을 징검다리로 해서 보다 과감하게 유럽의 근대 정치 사회개념들을 받아 들여 문명사적 변화를 이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꿨다. 현실의 국내정치는 양 극단의 갈등을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를 통해 풀어 보려는 어려운 노력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21세기 문명사적 변화의 가능성을 맞이하면서 국내의 정치 사회세력들은 다시 한 번 세계화론 과 반세계화론의 경직화된 갈등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한국적 세계화라는 변환론의 해답을 놓치고 있다.

 

Ⅳ. 실천론의 빈곤

 

21세기 복합변환의 삶을 제대로 아는 문제는 불가피하게 바람직한 “함”의 문제를 제기한다. 삶, 앎, 그리고 함의 관계는 대단히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함은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하지 않으려면 철저하게 앎을 기반으로 한 실천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반면에 복합성을 단순하게 파악해서 실천전략을 마련하면 앎은 함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어렵다. 앎도 함의 현장감과 긴장감을 공유하지 못하는 한 복합적 삶의 현실과는 유리된 자폐증의 앎의 세계를 외롭게 구축하게 된다. 삶의 복합성이 커져 갈수록 단순 사회과학의 몰실천성은 심화될 수 밖에 없다.

 

존재론의 고민 없이 인식론의 도구들을 수입해서 쓰는 지식수입국의 사회과학은 앎과 함의 괴리를 더 심각하게 겪을 수 밖에 없다. 한국의 사회과학도 예외는 아니다. 19세기 한국국제정치학은 만국공법, 균세론, 민족주의론, 아시아 연대론 등을 수입하여 우리 나름의 실천전략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망국의 설움을 겪어야 했다. 21세기의 한국국제정치학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자신하기 어렵다. 21세기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세계지식시장의 모든 명품과 모방품이 거의 다 수입되고 있으며 이를 거부하는 비판이론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형 복합적 삶의 구축을 위한 제대로 된 인식과 실천의 과제는 여전히 커다란 숙제로 남아 있다.     

   

Ⅴ. 한국국제정치학의 핵심 연구과제

 

한국국제정치학의 존재론적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첫 걸음은 21세기 한국국제정치가 당면한 복합변환의 세계정치를 본격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것은 21세기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부상하고 있는 네트워크 지식기반 복합국가 연구다.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등장한 네트워크국가와 새로운 무대로 구축되고 있는 지식기반 복합무대, 그리고 거미늑대 같은 복합연기를 변환사의 시각에서 분석해야 한다. 이 작업은 분석대상의 복합성 때문에 복합사회과학과의 공동작업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 

 

21세기 한국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바로 읽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해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화려한 연기를 선보이려면 전초전인 개념 전쟁부터 제대로 치를 수 있어야 한다. 그 첫 걸음은 개념사 연구부터 시작해야 한다. 21세기를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 우리 나름의 개념을 갖추려면 우리의 전통 개념이 19세기 중반 이래 3중 개념전쟁을 통해서 어떻게 오늘의 근대개념으로 바뀌어 왔는가를 조심스럽게 추적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21세기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핵심 정치 사회개념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비로소 변화하는 세계를 품기 위해서 허겁지겁 전파의 중심국들이 재빠르게 생산하고 있는 새로운 개념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입하는 대신에 21세기 한반도에 맞는 개념들을 3면전의 어려움을 충분히 고려하여 조심스럽게 궁리하게 될 것이다.

 

복합변환적 삶의 앎을 우리 자신의 삶의 복합변환을 위해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야 하는가에 대한 실천 국제정치학의 천착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은 21세기 한국의 복합변환의 기본 성격을 밝혀 주는 역사와 사상/이론의 기초 사회과학과 복합변환이 구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삶터의 지역연구와 정책연구라는 응용사회과학의 복합화다.  따라서 한국의 네트워크국가화를 위해서는 한반도, 동아시아, 지구, 사이버공간, 그리고 국내공간에 촘촘한 거미줄을 치는 실천전략 연구가 필요하다. 네트워크국가로서 한국이 지식기반 복합무대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다보탑 못지 않게 아름다운 3층 복합무대를 꾸미는 연구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19세기 유길준이 생존전략 으로서 이중체제인 양절체제(兩截體制)를 고민했듯이 우리도21세기 한국형 복합연기를 궁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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