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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젊은 그들 : 19세기와 21세기
 

2007-09-18 

반갑습니다.  오늘 여러분들하고 한 시간 반 정도 같이 얘기하고 대화를 나눌 제목은  강연 제목으로는 약간 어색한지 모르겠지만 역사속의 젊은 그들 : 19세기와 21세기입니다. 조금 전에 김영호 교수가 얘기한 것처럼 그 동안 진행해 온 11회의 근현대사 바라보기 강좌의 마지막이 되겠습니다. 열 한분 선생님들이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심각하게 얘기를 끌어오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무리는 19세기를 뒤돌아보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가지는 21세기적인 의미는 무엇인가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초에 이 모임은 청년 또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역사 바로 보기의 기회를 마련해 주려고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노‧장‧청을 다 포함하는 오늘의 모임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마무리의 초점은 아무래도 21세기 새로운 세기를 지고 나갈 젊은 세대들에게 맞추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강연 제목이 약간 소설 제목같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얘기의 시작은 청소년 역사 강좌의 주인공인 청년이란 말의 역사부터 하겠습니다. 다음은 19세기의 청년들은 어땠으며 그리고 21세기의 청년들은 어때야 될 것인가라는 순서로 얘기를 풀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얼른 생각하기에 청년하면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단어여서 우리가 이 단어를 오랫동안 사용해 왔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부터 청년이란 단어를 쓰기 시작했나를 찾아보면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청년이란 말을 본격적으로 유행시킨 사람은 일본의 유명한 논객이었던 도쿠도미소호(德富蘇峰)입니다.  그가 1887년에 발표한『신일본의 청년(新日本之靑年)』이라는 글과 함께 청년이라는 단어는 널리 쓰여지기 시작했습니다. 도쿠도미소호는 그 당시로는 떠오르는 논객의 하나로서 이 글을  발표할 당시 아직 20대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이 글을 쓴 데에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신일본 청년이라는 말은  구일본 노인을 넘어서서 구일본 장사와 대비되는 표현이었습니다. 1887년의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이후 메이지 10년대 민권운동의 격동기를 치른 후 막 메이지 20년대로 접어드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비분강개와 난폭으로 요약되는 구일본의 장사 세대가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것을 대단히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건들거리는 장사 스타일의 세대로서는 20세기의 신일본을 만드는데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람직한 20세기의 일본을 위해서는  자기 성찰적이고 구정치적이 아닌 새로운 청년 세대의 등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청년이라는 용어는 이런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구일본이 아니라 신일본을 위해서 장사를 대체하는 새로운 주인공으로 쓰이기 시작한 청년이라는 단어가 한 세기를 흘러오는 사이에 우리에게 대단히 익숙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1880년대 전후의 일본의 청년과 비교하여  당시 조선의 청년들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가 하는 얘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구체적 예로서  박규수 사랑방의  젊은 그들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박규슈는 잘 아시겠지만 19세기 우리가 서양 문화 또는 문명과 만나서 문을 열어야 될 것인가 말아야 될 것인가, 개화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위정척사의 길을 가야 할 것인가라는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우리가 19세기 무대에서 살아남으려면 개화의 길로 결국 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조심스럽게 선도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규수의 사랑방 터는  요즈음 대통령 탄핵재판으로 유명해 진  헌법재판소 안에  팻말로만 남아있습니다.  박규수는 1866년 셔먼호 사건이 났을 때 평양감사를 하고 있었고 1869년에 서울로 돌아 와 중요한 관직들을 거치게 됩니다. 1872년에는 청에 두 번째 연행을 다녀오고,  1874년에 우의정에서 물러난 후, 박규수는 2년 반 동안 사랑방에서 훗날 개화파로 성장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신조선의 장래를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게 됩니다. 당시 박규수 사랑방에는 이런 저런 사람들이 모였는데 조금 나이가  많은 김윤식, 어윤중 같은 사람들도 있었고  그보다 나이가 어린 청년들로 훗날 갑신정변 4인방으로 불리는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들이 있었고, 그 밖에 유길준도 있었습니다.  갑신정변 4인방의 청년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에서 사건이 일어나서 3일천하로 끝나 버린 정변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합니다.  1884년에 당시 정변의 총책이었던 김옥균은 33세 이었습니다. 홍영식의 나이는 네 살 차이이니까 29세였고, 그 다음 서광범이 26세, 박영효가 23세 이었습니다.  당시 군사총책을 맡고 있었던 서재필의 경우는 공식나이로는 17~18세 이었고  실제로는 21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즈음의 대학생 나이에 혁명의 막중한 일들을 맡았던 것이죠.  일제시기에  김동인의 『젊은 그들』이라는 장편 역사 소설이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얘기도 바로 18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오늘 여러분들에게  1880년대에 20대 또는 30대 초반으로서 구조선을 신조선으로 바꾸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젊은 그대들과 21세기에 오늘 이 자리에서  얘기를 듣는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을  세 가지 시각에서 비교해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그들이 보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  20대 또는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결국 적지 않은 수가 죽었고 또는 오랜 기간 망명 세월을 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전을 당시에  실현하려고 했던 것인가를  첫 번째 비교하는 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다음으로 만약 그런 비전이 있었다고 하면 그 것을 우리 땅에서 실천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는 어떤 힘을 가지고 그 비전을 현실화하려고 했던 것 가를 따져 보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힘만 가지고 비전을 현실화 할 수 있다고 하면 더 이상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여건으로는 우리 힘만 가지고는 불가능 했습니다. 그러면 바깥의 힘을 어떻게 쓸려고 했던가 하는 것이 외세 활용론입니다. 또 하나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국내 역량을 어떻게 끌어 모아  그들의 비전을 이 땅에 실현하려고 했던 것인가를 검토하겠습니다. 다 아시겠지마는  며칠 안 남은 내년인 2005년은 조선조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린 을사조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따라서 결과를 보면 이러한 비전을 현실화하려는 노력은 결과적으로 좌절했던 것입니다. 우선  안팎의 힘을 모아서 비전을 실현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간결하게 요약하겠습니다. 그리고 21세기에 또 한 번 세계가 바뀌고 있다고 하면 그 속에서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바라다보고  21세기의 새로운 역사 무대에서 중심에 설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짚어보려고 합니다.

  

따라서 19세기 새로운 조선을 모색하는 젊은 그들이 당시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가 또  그런대로 세상을 바로 보고 있었던 것인가라는 얘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9세기 중반이라는 시기는 우리의 지난 500~600년 역사를 뒤돌아보면 대단히 독특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양의 유럽과 미국 세력들이 동아시아에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19세기 중반에 우리는 그 동안 살았던  삶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의 삶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전통 천하질서의 예의(禮義) 국가에서 근대국제질서의 부강(富强)국가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시기였습니다. 얼른 보면 상당히 어려운 표현입니다. 좀 쉽게 풀어서 얘기 하면 천하질서와 근대국제질서가 짝이 됩니다. 천하는 하늘 아래라는 뜻이니까 사실은 전체가 하나 된 모습을 얘기하는 거겠죠.  천하라는 개념은 중국에서 춘추시대 주나라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원칙적으로  천하라는 하나의 공간 속에  여러 나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편,  국제질서는 나라 국(國)자하고 사이 제(際)자에서 보다시피 나라가 따로따로 나눠져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죠. 지금 우리는 근대 국제질서 속에서 150~160년 살아오는 가운데  세계라면  당연히  나라로 나눠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천하질서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 됐죠. 이것은 그 당시 사고로는 엄청난 변화를 말합니다.  또 천하질서의 시대에는 각 국가들이 원칙적으로 예(禮)를 가장 중심되는 가치로 삼고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부국강병의 시대에는, 군사력이 강하고 경제력이 강한 국가가 선진국이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대접을 받게 됐습니다.

  

따라서 19세기 서양세력이 다가왔을 때 충격은 대단히 컸습니다. 따라서 당시 우리 국내 에서는 서양세력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지만 크게 보아서 논의가 위정척사와 문명개화 그리고 동도서기라는 3개 부류로 나눠졌습니다. 당시 외세의 충격은 상상을 넘어 서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위정척사의 입장에서는 서양세력을 단순한 야만을 넘어 선  금수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한편 문명개화의 입장에서는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서양세력들이 우리보다 더 효율적으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보다 낫게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동도서기론은 서양의 문물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기를 희망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습니다마는  위정척사, 문명개화, 동도서기 의 싸움은 오늘의 세계화와 반세계화의 싸움보다 훨씬 더 격렬한 싸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시기에  젊은 그들이 택했던 비전은 세계의 움직임을 자세히 또는 바로 보니까   세상의 커다란 흐름의 대세가 예의(禮義)국가에서 부강(富强)국가라는 새로운 국가목표로 일단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이들이 봤던 비전은 틀렸다고 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지난 200년 동안 부강국가를 추구했던 국가들은 결국 살아남았고 그것을 거부했던 국가들은 모두 무대에서 사라지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비전의 면에서는 일단 점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젊은 그들의 비전이 현실 무대에서는 제대로 뿌리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뿌리를 내렸다면 우리가 1905년이나 1910년에 무대에서 쫓겨나야 되는 비극을 맞이하지는 않았겠죠. 뿌리를 내리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안과 밖의 힘을 활용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비전을 현실화하기 위한 외세 활용론은 이미 1880년 전후부터 논의됩니다. 부강국가를 건설하려는 경우에 우리가 가진 힘만으로는 단기간 내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죠. 일본은 메이지유신이후 비교적 단기간에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외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면 우선 어떻게 바깥의 힘을 성공적으로 빌릴 수 있느냐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하나는 외세를 일단 받아 들여서 외세의 힘을 쓸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친 외세의 입장이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외세를 섣부르게 받아들이면 내세(內勢)를 모두 무력화 시키므로  일단 외세를 반대할 수밖에 없다는 반외세의 입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힘이 상대적으로 모자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힘을 빌리기는 하되 우리를 잃지 않으면서 힘을 빌려 보려는 것이 용(用)외세의 입장이 있었습니다. 구체적 현실로 들어가 보면 선택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겠죠. 그 예로서 김홍집이 2차 수신사로 1880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당시 주일 청국 공사였던 하여장과 여섯 차례에 걸친 긴 필담을 나누고, 황준헌이 작성한 『조선책략』을 받아 오게 됩니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19세기에  살아남으려면 자강(自强)과 균세(均勢)의 두 가지 기본 전략을 빨리 터득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禮)만 가지고 살아남기는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죠. 상황이 바뀌어서. 원래 예의 종주국이었던 중국이 새로운  조언을 한 셈이죠. 자강은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이고 균세는 자기 힘이 모자라니까 주변의 강한 힘들을 적절히 균형 잡힌 형태로 힘을 빌리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입니다. 당시 청나라는 청나라의 입장에서 조선이 택할 수 있는 길로 친(親) 중국 결(結) 일본 연(聯) 미국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외세의 힘을 빌리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커다란  실패를 하게 됩니다. 개화세력들은 문명개화를 위해서 우선은 청에서 벗어나는 것이 큰 목표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 모델은 근대국가 모델은 아니었기 때문이죠. 청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바깥 힘을 빌려야 하는데 쉽사리 힘을 빌려 줄 나라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 끝에 힘을 빌린 나라가 일본이었습니다. 그러나 청에서 벗어나서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일본의 힘을 빌렸더니 근대국가의 완성이 채 되기 전에 일본의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고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마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이 비극은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교훈의 하나로 받아 들여야 할 것 입니다.

  

두 번째로 19세기에 젊은 그들의 비전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국내 역량이 충분히 결집될 수 있는 기회가 쉽게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예들이 있습니다마는 대표적인 예로 갑신정변, 갑오개혁, 애국계몽운동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갑신정변은  처음 시작할 때 말씀드린 대로 1884년에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에 대해 정면충돌이 일어났던 사건이었습니다.  1880년대 젊은 그들이 짧은 3일천하의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허나 이 정권은 3일 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은 붕괴하게 됩니다.  그 당시 밖에서는 청과 일본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안에서는 수구사대와 개화자주라고 하는 세력이 갈등 관계에 있었습니다. 결국 수구사대가 청과 연결되고 개화자주가 일본과 연결되는 속에서 잠시 반짝했던 3일천하의 정변은 실패하고 청의 본격적 개입을 불러오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청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노력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부터 1894년 청일전쟁까지의 10년 동안은 청의 압도적인 영향력 속에서 지내게 됩니다.  사실상 청의 원세개 감독 하에 10년 세월을 보내는 어려움을 겪게 되죠.

  

이런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 난 것은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에서 청에게 수모를 겪은 후 절치부심하면서  힘을 키운 일본이 10년 만에 청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습니다.  청일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전쟁 핑계용 내정개혁 요구를 활용하여 우리 정부는 국내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갑오개혁을 추진합니다. 이 시기에 국내 역량의 결집 차원에서 보면 국내 정치세력은 크게 다섯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우선 갑오개혁과 함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유길준을 비롯한 개혁 6인방이 있었죠. 이 때는  갑신정변후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까 유길준의 나이도 이미 30대 중반이었죠. 또 한 세력은 갑신정변에서 천만다행으로 죽음을 면하고 일본 또는 미국으로 망명했던 세력들로 대표로는 박영효를 들 수 있겠죠. 다음으로 외국 공관들이 많이 모여 있던 정동을 거점으로 하는 친미세력을 비롯한 정동 파죠.  또 고종이나 명성황후에게 충성을 받치고 있었던 근황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약해져 가고 있었던 대원군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눠져 있었던 국내 정치세력들은  쉽사리 하나로 결집되기 어려웠습니다.  오늘날 여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보다도 더욱 치열한 싸움들을 했습니다. 국제 역량의 활용이 현실적으로 점점 불가능해 져 가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국내 역량의 결집이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1905년에 을사조약의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됨으로서 러시아까지 한반도의 국제무대에서 물러나게 되니까  자력 만으로만은 버틸 수 없었던 한국은 자동적으로 일본의 독점적 영향 속에  들어 간 것이죠. 그 때 마지막 몸부림으로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나고  아까 말씀드렸던 나눠져 있던 시각들이 하나로 서서히 합쳐지기 시작하는 분위기를 맞이하게는 됩니다. 그러나 뒤늦게 정신을 차려보니까 나라는 이미 서서히 없어져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국운을 다시 돌리지 못하고 국망의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게 긴 얘기를 돌아서 온 것은 단순히 19세기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11회의 강좌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가 근현대사를 바로 보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근현대사를 바로 보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미래사 바로 만들기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앞으로의 역사를 바로 만들기 위해서 근현대사를 바로 보자는 것입니다. 과거사 청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사 청산의 문제입니다 또는 미래사 구상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미래사 구상은 더 이상 19세기의 좌절을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사의 커다란 흐름을 그나마 초보적으로 볼 줄 아는 비전은 있었으되 그 비전을 현실화 해 나가는 과정에서 내외역량의 동원에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무대에서 엑스트라로 또는 무대 밖으로 밀려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1세기의 새로운 무대에서 우리가 역사의 중심에 서려면 어떤 준비를 어떤 모습으로 바로 해야 할 것인가라는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선 비전의 문제입니다. 19세기의 젊은 그대들이 엉성하더라도 세계사의 흐름을 초보적으로 바로 보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우리는 21세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바로 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19세기의 변화가 충격적인 변화였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국내적으로 여론은 오늘도 대단히 갈려 있어서  이런 청소년 강좌도 열고 있습니다만 19세기에는 더 갈려 있었습니다. 오늘의 시점에서도 19세기 못잖은 변화를 우리가 지금 겪고 있습니다. 어디에 변화가 오고 있는지 하루하루 바쁘게 살면서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변화하는 내용을 주인공, 무대, 연기로 나눠서 구체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1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주인공과 무대와 연기는 분명히 우리가 19세기 중반부터 겪기 시작했던 변화에 버금가는 변화를 겪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축약된 모습의 하나는 유비퀴터스 네트워크 국가이고 두 번째는 지식기반 복합 국가고 세 번째는 늑대거미 국가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세 개가 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유비퀴터스 네트워크 얘기를 초등학생들이나 중학생들이 알아들을까 걱정했더니 우리 대학원생 조교가 아마 선생님보다는  훨씬 더 감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요즈음 텔레비전에서  any time, any where 라는 광고를 자주 보게 됩니다. 쉽게 얘기해서 유비퀴터스는 어느 시간이나 어느 장소에서라는 뜻입니다. 유비퀴터스를 우리말로 편재적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편재라는 말은 너무 어렵습니다. 편재한다는 것은 신이 어떤 시간과 공간에나 두루 존재할 때 쓰는 말이죠.

  

천하에서 국제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잘 모르겠는데 국제에서 이제 유비퀴터스 그물망의 세계로 간다는 것은 어디로 간다는 얘기냐라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국제질서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국제 질서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국제질서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분명히 주인공의 부침(浮沈)이 있습니다. 미 제국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중국은 얼마나 빠르게 부상할 것인가,  일본은 명실상부한 대국이 될 것인가, 그 가운데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동북아 무대의 주인공에도 분명히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결론만 말씀드린다면 미국은 쉽게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또 한번 미국의 세기가 올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판단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이  지금보다는 훨씬 겸손해져야 되고 주변 국가나 세력들과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의외로 미국은 상당히 오래 세계질서의 중심에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중국은 흔히 예상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부상을 진행할지도 모릅니다. 또 21세기의 일본은 우리가 얼른 생각하는 것만큼 쉽게  기울어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미국을 최대한 활용하는 형태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입니다.

  

우리 주변 나라들의 부침을 얘기 했습니다마는 21세기 무대를 바라다보면  국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다양한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수 혼자서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고 백댄서들도 등장 했고 그 밖에 여러 연기자들이 등장해서 다양한  역할들을 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주인공들이 서로 끈으로 연결되어 그물망 형태로 무대에 서있는 모습을 우리한테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19세기에 전통적으로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를 세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근대 국제질서를 만나면서 느꼈던 당혹감에 못지않게 21세기의 기성세대들은 21세기 무대의 주인공들을 바라다보면서 굉장히 현란하고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소년 세대들한테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무대 주인공들의 변화입니다.

  

두 번째로 무대도 상당히 바뀌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포함하는 전통적 천하무대의 모습은 예를 중심으로 하는 무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세대가 보면 대단히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는 예의 무대가 19세기나 20세기로 들어오면 상당히 화려해 집니다. 하나는 돈의 무대고 또 하나는 폭력의 무대인 부국강병의 무대입니다. 이 무대가 21세기가 되면  훨씬 복잡한 무대로 바뀝니다. 젊은 세대나 어린세대에게 장래 무엇이 되겠냐고 물어보면 얼마 전까지도 대통령, 장군, 재벌이 되겠다는 대답을 쉽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21세기 청소년들의 대답은 그 것보다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탤런트가 중요한 꿈이 될 수 있고 또는 사회운동가도 중요한 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왕에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무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보기술혁명에 따라서 지식 무대가 대단히 중요한 무대로 급격히 부상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냉전이 종식되고 탈근대를 포함한 복합의 시대가 찾아옴에 따라 문화 무대가  중요해 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그동안 이루어 왔던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인해서 생긴 환경 무대입니다. 따라서 이런 무대에서 골고루 잘 뛰어야 21세기 무대에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과거처럼  힘만 세고 돈만 있다고 살아남는 것이 아닙니다. 정보지식도 강해야 되고 문화적인 세련도도 있어야 되고 환경의 부작용도 대단히 적은 모습으로 나라를 또는 개인을 바꿔 나갈 수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무대에서 하는 연기의 내용도  새로운 모습의 늑대거미가 되어야 합니다. 무대에 올라간 주인공들이 거미줄을 촘촘히 엮어서 생존 경기를 하고 있는데 나만 독불장군으로 뛰어다니는 경우에는 살아남기가 대단히 어렵겠죠. 거미줄을 치는 거미의 특징은 순식간에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까지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거죠. 그게 유비퀴터스의 특징입니다. 무대를 혼자 외롭게 뛰어다니는 것은 늑대의 삶이죠. 그러나 21세기에서는 늑대의 연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거미의 새로운 연기만 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겹쳐지는 것입니다. 21세기의 화려한 무대에서 살아남는 것은 늑대같이 살면서 거미줄도 칠 수 있어야 합니다.  상상으로만 이런 생각을 하고 우연히 인터넷에 들어가서 장난삼아서 늑대거미를 쳐봤어요. 내 머릿속에 있는 가공의 연기 주인공으로 상정했던  늑대거미가 실제 있더라고요. 늑대적인 속성을 가진 거미가 존재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대단히 이중적으로 움직이고 있겠죠.

  

이제까지 설명한 세 가지 변화가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데  그 변화를 우리가 제대로 읽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래사 바로 만들기를 위해서 변화하는 세계를 바로 보고 있는 것이냐 하는 면에서는 부정적입니다. 19세기의 386세대인 갑신정변의 4인방은 1884년에  역사의 변화하는 모습을 바로 보고 있었으며  주인공과 무대, 그리고 연기의 변화에  그런대로 감을 잡고 있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청소년기를 겪고 21세기에 386 세대로서 등장한 오늘의 주인공들은 조금 전에 얘기한 유비퀴터스 그물망이나 무대의 복합 또 늑대거미의 연기를 바로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바로 보지 못할까요. 그것은 21세기의 386 세대가  세계를 바라다보는 잣대가  하나는 탈냉전이고, 다른 하나는 탈권위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11회의 강좌를 들으면서  느꼈겠지마는 20세기 후반의 청소년이었던 오늘의 386세대는 냉전과 권위주의의 피해 속에서 1980년대를 살았기 때문에 21세기에 맞지 않는 닫힌 시공간 의식을 형성하게 된 거죠. 결국 20세기의 눈으로 21세기를 보게 된 거죠. 내가 1980년부터 서울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니까 이 세대와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 시대적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면도 있었습니다. 그 두 개의 시각에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불행하게도 역사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변화를 해서 지금 탈냉전이나 탈권위주의의 수준에서 유비퀴터스 네트워크나 지식기반 복합국가나 늑대거미를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21세기의 미래사를 바로 보고 바로 만들기 위해서는 21세기를 준비하고 있는 10대나 20대 초반들이  해야 할 것에 대해서 제가  한 두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하나는 유비퀴터스 네트워크 짜기입니다.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그물망을 짜야 되는데, 보다 구체적으로는 최소한 5중의 그물망을 짜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 이런 생각의 전환이 젊은 세대한테 필요한가를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주 일본 정부가 신방위계획대강을 새로 발표했습니다. 1976년, 1995년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10년만인 셈입니다.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의 일본 군사력의 장래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안의 실질적 밑그림을 그린 일본 총리부의 “안전보장과 방위력에 관한 간담회 보고서”의 서문에서 좌장을 맡았던 아라키 히로시(荒木浩) 도쿄전력 고문은 13차의 간담회 내내 자신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成美)제독의 한 마디를 흥미 있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일본 軍令部는 大艦巨砲의 건조를 요구하는 방대한 해군군비확장계획안을 제출했다. 당시 일본해군의 지성을 대표했던 이노우에 항공본부부장은 메이지(明治)의 머리로 쇼와(昭和)의 군비를 다루지 말라고 비판하면서 해군의 공군화를 강조했습니다. 아라키 고문은 이노우에의 머리로 21세기 일본 방위력을 생각해 본다면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의 결집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눈으로 21세기의 일본을 함부로 재단해서 21세기를 살게 될 다음 세대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문제입니다. 총리 간담회 보고서를 보면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은  21세기의  미래를 위해 일단  미국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21세기 일본은  중국을 가상 적으로 설정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  스스로의 힘을 키우지만 어쩔 수 없이 밖의 힘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 중에도 가장  중요한 활용 대상으로 미국을 설정한 것입니다. 다음이 한국쯤 되겠죠.

  

동아시아에 깊이 들어와 있는 미국은 이미 21세기적인 유비퀴터스 네트워크 사고로 상당히 변환되어 있습니다.  한반도 입장에서 보면  한쪽에는 미국과 일본이 21세기 적으로 동아시아를 새로 재편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면 또 한쪽에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중국은 지금 어디로 달리고 있느냐 하면 적어도 2020년까지는 다른 모든 것을 참고 경제에만 전념하겠다는 것입니다. 경제우선론 내지는 선부(先富)론을 강조하면서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인구가 13~14억 되기 때문에 지금 공식적으로 1인당 소득이 1000 달러, 국민총생산 규모는 1조3000천억 달러 정도예요. 중국 당국이 기대하는 대로 7- 8%의 경제성장을 계속 한다면 2020년에는 4~5조 달러 크기가 되겠죠.  간단치 않는 액수죠. 전 세계의 GNP가 현재로는 33조 달러정도 됩니다. 미국이 11조 달러, 유럽이 10조 달러 전후, 일본이 4조 달러수준 입니다. 우리 경우에 달러 환율이 격변해서 경제 생활의 커다란 변화는 없이 갑자기 1인당 국민소득이 13000 달러로 바뀌었기 때문에 국민총생산 규모가 0.6조 달러 정도 됩니다. 따라서 중국의 국민총생산이 2020년에 4~5조 달러가 된다는 것은  일본 수준이 된다는 것이죠. 일본이 왜 중국의 약진에 대해서 불안해하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답답한 것은 북한은 1인당 국민소득이 800달러에 불과하면서도 아직도 19세기 용어인 강성대국이라는 구호를 앞세우고 21세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북한 문헌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강성대국은 앞에서 말씀드렸던 19세기 젊은 그대들의 비전이었던 부강국가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쪽에는 21세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미국과 일본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20세기적 목표에 매진하고 있는 중국이 있습니다. 한 편 북쪽에는 19세기의 목표를 내 걸고 있는 북한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숙제를 풀어야 합니다. 간단하지 않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미․일을 선택하면 중국이 문제고 중국을 선택하면 미․일과 멀어져서 21세기 무대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 하는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난관을 돌파하는 대안으로서 우리 젊은 세대에게 작은 거미가 되자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21세기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도에서 보자면  큰 거미가 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 같은 큰 거미들이 굉장히 큰 거미줄을 한쪽에서  치밀하게 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단순히 큰 거미가 아니라  굉장히 큰 늑대 거미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매력적이고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는 작은 거미가 되어 적어도 5중의 복잡한 거미줄을 쳐야 합니다.  5중 거미줄의 하나는  남북의 거미줄입니다. 19세기적인 통일은 21세기에는 반드시 적절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건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라고 지적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21세 통일은 하나로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것은 19세기 국가 목표일수 있지마는 21세기에는 하나로 통해서는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모든 것과 통해야 합니다. 전통(全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부 통하려면 결국 거미줄처럼 연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남북의 거미줄 치기가 첫 번째  목표입니다.

  

두 번째는 동아시아의 거미줄 치기입니다. 정부 산하에 동북아 시대위원회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동북아 사고는 아직도 20세기적입니다. 동아시아에 거미줄을 치려면 21세기 미․일이 치는 거미줄하고 튼튼하게 연결을 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중국이 치는 거미줄과도 든든하게 연결시키는 것이 큰 숙제입니다.  요즘은 거미를 보기가 어렵습니다만 조금 어두컴컴한 후미진 곳으로 가 보면 아직도 거미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책을 읽다가 답답하면 가끔 거미들을 찾아 나서서 유심히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화에서는 거미줄을 간단하게 그리고 있지만 실제로 큰 거미들이 친 거미줄을 보면 대단히 복잡합니다. 거미가 인간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입니다. 거미는 살아남기 위해서 사방팔방으로 연결된 입체적인 거미줄을 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근대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중 거미줄을 칠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겠지만, 오히려 거미한테 물어보면 미․일하고 거미줄을 튼튼히 치고 동시에 중국하고 보조거미줄을 칠 수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또 하나의 거미줄이 필요한 것은 지구 전체의 거미줄입니다  세계화와 반세계화의 싸움을 아직도 우리는 길거리에서도 하고 있고 시민사회 그룹 중에 찬성하는 쪽도 있고 반대하는 쪽도 있습니다. 이것은 다 구시대적인 발상입니다. 이미 세계화와 반세계화의 이분법은 의미가 없습니다. 21세기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 세대들은 한국적 세계화의 그물망 치기를 하루빨리 배워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 다음에 사이버 공간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공식적으로 인터넷의 사용도나 초고속 전산망이 깔려있는 수준은 전 세계 1위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것을 이용해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별로 자신 있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이트 접속 내용을 보면 여전히 게임과 포르노가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이트에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여건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은 밖을 나가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유럽 또는 호주에 가서 인터넷을 쓰려면 한국에 비해서 굉장히 불편합니다. 우리는  편하기는 합니다마는 그 안에 정말 그물망을 제대로 짜고 있느냐 하는 것은 의문입니다. 아직 남들이 엉성하게 거미줄을 치고 있어서 그에 비해서 대단히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조건을 활용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지정학적인 공간에서는 4개의 제국에 둘러 쌓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 분단된 한반도로서는 쉽사리 탈출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운명적으로 지구를 떠나기 전에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지구를 떠나는 한 가지 방법은 사이버 공간에 그물망을 치는 것입니다. 우리 경우에는 굉장히 중요한 공간입니다. 

  

마지막 중요한 그물망 짜기는 앞에서 얘기 했던 것처럼 국내의 거미줄을 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내의 정치 사회세력들이 지나치게 경직되게 우로 좌로 또는 뉴 라이트나 뉴 레프트로 편을 갈라서 서로 싸움을 계속하면 우리는 당면한 21세기 미래사 바로 만들기라는 숙제를 제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근대의 숙제 풀기도 상대적으로 늦어 먼저 푼 남들이 이미 상당히 앞서 가 버렸기 때문에  역사의 지각생이 되었습니다. 검정고시를 통해 건너뛰고 또 빠른 속도로 따라 잡아야 하는데 역사의 지름길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지름길을 제대로 찾기 위해서는 문제를 정확히 읽고 정답을 찾아야 합니다. 정답을 찾기 위해서는 5중 그물망 짜기와 함께 무대의  복합 건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 영화관들은 다 복합 상영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화관에 가면 영화는 한편만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무대는 안보, 번영, 지식,  문화, 생태 균형의 복합무대로 짜여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합 무대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새로운 세대를 어떻게 키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숙제입니다.

   

마지막 결론으로  한국적 세계화 체제의 부상 없이는  21세기 한반도 미래사 바로 만들기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돌파구는 바로 오늘 강좌를 들으시는 21세기 청소년들 여러분입니다.  20세기 386세대의 역사적인 역할은 조금 심하게 얘기 하자면 끝났습니다. 탈냉전이나 탈권위주의로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근대의 숙제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중심권에 있는 스타들은 이미 그 것들을 다 기본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앞으로 추구해야 할 구호는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천신만고해서 얻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자족하고 있으면  또 한번 무대에서 엑스트라로 전락하거나 또는 무대에서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아무도 관객이 들지 않는 무대에서 외로운 연기를 할 수 밖에 없을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대들이 갖춰야 할 것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인공 차원에서 그물망을 최대한 활용해서 무대 중심에 서는 훈련을 해야 하며  동시에 여러 무대가 복합되어 있는 가운데 지식기반 복합국가를 건설하는 숙제를 푸는 열쇠를 찾아야 합니다. 이런 숙제를 하루 빨리 풀려면 육체의 젊음이 아닌 사고의 젊음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대학교 신입생들에게 늘 하는 얘기가 그렇게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늙은 생각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10대가 40~50대의 사고로 세상을 바라다보고 행동하지 말고 좀 젊게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려면 적어도 22세기의 사고로 21세기를 바라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근현대사를 바로 보는 젊음, 또 21세기 미래사를 바로 만들기 위한 젊음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늘의 여의도도 청와대도 육체적으로는 젊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무 늙은 386세대가 모여서 21세기를 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21세기는 오늘의 386 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새롭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늙은 386 세대 대신에 이 얘기를 듣고 있는 바로 여러 분들이 21세기의 젊은 그들로서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준비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이상으로 21세기의 사랑방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질문해 주세요. 

 

질) 저는 이화외고 2학년 이유민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이 강조하신 그물망 짜기라는 것이 좀 막연하고 저희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국가이니 만큼 우리사회에서 추구하는 것이 부와 경제력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 것들이 20세기의 가치관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물망을 짜는 목적과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시간이 좀 있으니까 일문일답식으로 하죠. 그물망은 쉽게 얘기해서 이런 식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물망만 봐 가지고는 사람이 거미가 아닌 한 잘 알 수가 없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이때까지 살아온 세계와 그물망 세계는 어떻게 다르냐 하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미관계, 한․일관계를 생각하는 경우에 21세기 젊은이들이 그물망 관계로  생각하는 것과 19세기 이래 살아왔던 사람들이 국제 관계로 생각하는 것과는 얼마나 다르냐는 것입니다. 요즈음 시끄러운 한․미 동맹관계도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우선 한국이 세계무대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 해 보죠. 우선은 스스로의 힘을 키워서 살아남으려는 노력을 하겠죠. 점을 중심으로 하는 일차원의 생존전략이죠. 그러나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자기 힘만으로 21세기 세계를 살아가기는 불가능합니다. 가장 힘 센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따라서 각자 자기 힘만으로 안 되니까 모든 나라들은 이해를 같이 하고 마음 맞는 나라들하고 최소한으로 선으로 연결하는 이차원의 생존전략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 것이 우리가 19세기이래. 배워 온 근대 동맹 국제정치입니다. 우리 공식 정부의 입장인 협력적 자주국방은 바로 이 수준의 사고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구를 입체적으로 활용하는 3차원의 생존 전략입니다. 그러나 21세기의 세계는 1차원과 2차원. 그리고 3차원을 넘어서서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서는 유비퀴터스 네트워크의 4차원 생존 전략으로 변환하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국가라는 주인공끼리 최소한 줄긋기를 해서 관계를 늘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터내셔날이 아닌 인터넷이라는 말 그대로 거미줄과 거미줄이 서로 얽히게 되는 거죠. 예를 들어서 3억 인구의 국가와 1억 인구의 국가가 단순히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고 거미줄로 얽히는 경우에는 두 나라는 안과 밖을 넘어서서 사실상 둘이면서 하나가 되는 셈이죠. 그리고 국가간만 엮는 것이 아니라  요즘은 유럽연합(EU)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지역 국가가 생겼고   세계무역기구(WTO)같은 것은 지구 조직도 대단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죠. 또 부정적으로는 세계 테러집단이라는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해서 자기 나름의 그물망을 짜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것을 막기 위해서도 전 세계적인 그물망이 필요하게 된 거죠. 그러면 여태까지 우리가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 안 되면 줄 연결하기해서 살던 적하고 지구 전체를 촘촘하게 그물망으로 엮은 것 하고는 얼마나 차가 날까요. 천에 비유하면 베처럼 엉성하게 짠 옷감과 1인치에 수천만 원하는 굉장히 촘촘한 옷감을 생각하면 되겠죠.

 

그렇게 촘촘하게 거미줄을 쳐가지고 결국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우리는 오랫동안 예의국가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근대 서양 제국들과 만난 이후 최근 1~2백년은 부국강병을 추구해 왔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연봉 많은 직업 또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직업을 원합니다. 조금 생각이 엉뚱한 경우에 명예가 있는 직업을 원합니다. 이 것은 지난  200년 동안 익숙해진 사고방식이죠. 그렇다면 이런 현실은 졸지에 사라질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는 거죠. 부나 폭력으로 강해지려는 목표는 여전히 작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가 여태까지 익숙해졌던 방식으로 만으로는 안 됩니다. 과거처럼 한나라 중심으로 경제를 극대화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굳이 내가 표현을 안보 번영 국가가 돼야 한다는 것은 21세기 무대에서 화려한 주인공은 부를 모으는데도 결국 타자를 완벽하게 거지로 만들고 나만 재벌이 되는 형태로서는 21세기에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국내적인 차원에서도. 당장 우리가 겪고 있습니다마는 분배와 성장이 어느 정도 균형 잡힌 형태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안팎으로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일국중심의 부국만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부민과 밖으로는 부세계가 동시에 고려되야 합니다. 군사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인다고 한다면 상대방도 똑같이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양쪽이 모두 불안한 상태로 밖에 살 수 없는 안보의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양쪽이 다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의미의 군사력을 갖추면서도  타자의 안보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며, 또 국내적으로는 국가 안보라는 명분으로  인권과 같은 개인 안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70-80년대의 우리나  오늘의 북한이 겪는 딜레마는 결국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중요합니다. 내가 지적한 것은 부국과 강병은  안보와 번영이라는 21세기의 형태로  여전히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정보․지식이나 문화나 또는 환경이라는 목표를 외면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고서 21세기 역사의 중심에 서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군사력이나 경제력들이 핵심적인 21세기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따라서 한 개인의 입장에서도 21세기의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새로운 고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21세기에  정말 매력적인 인간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스스로도 만족할 수 있는 매력 있는 인간, 매력 있는 국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힘을 키워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몸짱이 돼야 하느냐 돈짱이 돼야 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새로운 목표들을 추구해야 하느냐의 고민입니다. 조금 더 새로운 목표를 동시에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도 그렇고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농담으로 요새 유행하는 배용준 신드롬, 욘사마 얘기를 많이 하는데요. 우리가 제국에 둘러싸여서 살아남는 길은 결국 주변의 우리보다 덩치 큰 어깨들이 모두 매력을 느낄 수 있게 7000천만이 모두 다 배용준이 되자는 것입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매력 있는 개인, 매력 있는 국가로 생각해서 미․일은 미․일대로 우리를 품으려 하고 중국은 중국대로 우리를 품으려 하게 만들면서  쉽사리 한쪽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그 나름대로의 자기를 지켜나가는 매력을 어떻게 유지하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한 21세기의 미래사 바로 만들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더 이상 탈냉전이나 탈권위주의의 수준에서 우리가 멋있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미․일, 중국, 또 북한이 우리를 굉장히 매력 있는 상대로 생각해서 한번 보면 또 보고 싶고  한 번 만나면 또 만나고 싶고 더 나아가서 영원히 만나고 싶도록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복합적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령 북한에게 매력 있으려면 19세기로 돌아가야겠죠. 그렇게 돌아가는 경우에는 21세기적인 매력을 추구하는 미․일은 우리를 한번은 만나 봐도 다시 보고 싶지 않을 겁니다. 모두에게 주목받고 매력 있는 존재로서 무대에 서려면 그물망 짜기와 복합무대를 준비하라는 것이 내 주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주인공으로 복합 무대에서 화려한 연기력을 보여 주면  21세기의 모든 세력  모든 국가들은 매력을 느끼고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죠.

 

질) 백마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이지현이라고 합니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외세를 이용한다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이용당한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황준헌이 주장하는 책략은 중국과 러시아가 서로 싸우고 있는 사이에  미국을 끌어들여서 중국을 보호하고 다시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비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야 된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고르바초프 같은 사람이 나와서 러시아 체제를 다 바꾼 것처럼  해야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 재미있는 질문인데,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관한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아요. 시간이 없어 제가 길게 설명은 안했지만 『조선책략』은 우리말 번역도 나와 있어요. 초등학생이 읽어서 100% 이해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하면 번역본을 한 번 읽어 보세요.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질문중에 맞았다는 내용은 『조선책략』이 사실상 조선을 위한 책략이기 보다는 중국이 조선을 활용하려는 책략아니냐는 지적입니다.  외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부분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류 외교관은 낯을 붉히는 것이 아니고 속이 끌어도 면전에서는 늘 끊임없이 미소를 머금는 외교관이 일류 외교관입니다. 『조선책략』도 전형적인 예죠. 중국 외교관인  황준헌이 우리한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 수 있다고 책략을 써 준 것도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비극이죠.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 길을 잘 몰랐는데 이렇게 하면 너희들이 살 수 있다고 청의 외교관이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으니까요.  청나라의 일본 공사였던 하여장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책략의 내용과는 달리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는 뭐라고 쓰고 있냐하면 조선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조선을 완전히 청의 속국화하는 것이 상책이고,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하책이며,  중책은 청국이 힘이 현실적으로 모자라니까 한중관계라는 특수 관계를 유지하되 지금 힘을 휘두르는 국가들과 모두 조약을 맺게 해서 자기들끼리 힘이 균형 잡히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본국에 올리는 보고에는 조선을 청의 속국화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면서 김홍집에게는 당신네들의 살길은 균세와 자강 밖에 없다고 말해 준 것입니다.  김홍집은 고맙게 생각하면서 『조선책략』을 받아 가지고 돌아옵니다. 국내에서는  책략의 내용을 둘러싸고 이것이 우리가 살길이냐 아니냐 하면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는 우리가 살 길을 남의 나라가 써 준 것도 웃기는 일이고 두 번째는 책략을 써 주는 순간에도 속 마음은 복잡한 것을 우리가 충분히 몰랐던 것도 비극입니다. 그러나 청국만을 일방적으로 욕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중국이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또는 불란서나 영국이나 정상회담을 하면 다 악수하고 환하게 웃지만 반드시 웃고 있는 것만은 아닌 것이죠. 근대 외교는 늘 그래 왔습니다.

  

그러나 『조선책략』에 관한 질문 중에 뒷부분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자강만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비극이죠. 따라서 균세를 하라는 권고는 맞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균세를 해야 하느냐 입니다.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는 친 중국하고 결 일본하고 연 미국 하라고 했습니다. 중국 나름의 복안이었어요.  『조선책략』을 계기로 균세 논의가 우리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활발해 지기 시작했지만 특별한 묘안이 나왔던 것은 아니죠.  그 당시 젊은 그들은 중국모델로는 근대 국제 무대에서 살아 남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힘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일본의 힘을 빌려서 국내의 친중국 세력을 제거하려는 갑신정변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꺼냐죠. 갑신정변이후 유길준이나 김옥균은 당시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중립도 주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중립으로 가기 위한 힘이 없었던 것이 그 당시 우리 문제였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새로운 비전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고르바쵸프같은 사람의 출현이 필요하냐라는 것입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천해 보니까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비전의 현실화는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죠. 그러나 실패하더라도 시대에 맞거나 앞서 가게 변화를 하려면 비전이 필요한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 19세기 경우에는 비록 초보적이었지만 19세기의 젊은 그들로 대표되는 비전의 맹아가 있었습니다.  제 얘기는 21세기의 우리 시력이 19세기의 젊은 그들보다도 시력이 약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것은  굉장히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고르바초프의 경우처럼 시력을 웬만큼 가졌어도 비전을 현실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조금 전에 얘기 했듯이 인간이 눈만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니에요. 눈으로 본 것을 실천에 옮기려면 머리도 써야하고 주먹도 있어야 하고 위도 튼튼해서 국내외 역량을 총체적으로 모을 수 있어야 하죠.

  

더구나 비전이 없는 경우에 어떻게 비전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을 바꿔야 하나의 문제입니다. 적절한 예일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의 북한 문제를 가지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어려운 말로  북한 체제가 변환(transformation)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북한이  살려면 상당한 변환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꼭 김정일 위원장이 바뀌어야 한다고 한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북한이 추구하는 목표설정이나 동원하는 수단은 지금 같아서는 안 된다는 거죠. 북한의 21세기 목표와 수단을 바꿔야 하는데 그 경우에 사람을 바꿔야 하냐 아니냐라는 문제입니다.  역사를 보면 한 지도자의 비전이 시력 교정되는 경우가 예외적으로는 있습니다마는 확률적으로는 대개 비전을 바꾸려면 새로운 사람의 눈이 필요합니다. 내가  386세대가 21세기에 맞게 시력을 조정해서 새로운 비전을 가지라고 하는 대신 21세기의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안목을 키우라고 하는 것은 시력은 그렇게 쉽사리 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대의 기술로서 라식수술 같은 것도 등장을 했습니다마는 그러나 세대전체의 집단 라식수술이 가능한지는 의문입니다.

 

질) 이화외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저희 중고등학생들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답) 답변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동아일보의 청소년을 위한 시리즈 때문에 지난 여름에 처음으로 고등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세계적인 석학들과 국제회의를 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어려운 두세 시간을 대원외고 해외유학반 학생들과 같이 했습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라는 근본적 질문의 대답이 어려운 것은 우선 첫 번째로 나도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마는  만약 내가 대학 입시를 신경쓰지 않고 어떻게 공부하라고 하는 경우에 여기 학생들과 같이 오신 부모님들은 저 사람이 누구 신세 망칠 일이 있느냐고 생각하실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러 분들이 일단 원하는 대학에 들어오면 교정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개인 희망으로는 차라리 여러 분들이 섣부르게 색갈이 칠해지지 않은 백지 상태로 대학에 들어오면 좋겠어요. 이 시리즈를 시작한 이유도 그런데 있지만  근현대사를 굉장히 어설프게 교과서적으로 또는 편향적으로 배우고 오느니 차라리 백지 상태에서 온 학생들을 균형감 있게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입시 고민을 잠시 옆으로 밀어 놓고  21세기적인 안목으로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좀 어려운 얘기인지 모르지만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머리와 마음들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고생하면서 가르치시는 초등학교, 그리고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힘들지만  학생들에게 좀 더 미래 지향적이고 열린 공간의 시각을 키워 주셨으면 합니다. 나를 포함한 구세대 교육자들이  앞으로 미래를 살아갈 신세대에게 미래의 역사를 제대로 보고 살도록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학교에서 1~2학년 제자들 하고 이런 얘기를 자주 합니다. 지금 너희가 젊음을 불사르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 데, 30년 후에 그렇게 청춘을 받쳐서 한 공부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죠. 앞으로 30년의 변화는 엄청난 변화일거예요. 내가 대학을 1960년대 후반에 다녔는데 그 당시 대학 생활하고 40년이 지난 오늘 대학생활과의 차이를 오늘의 세대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30~40년 후의 세대가 오늘의 대학 생활을 상상하기는 더 어려울꺼예요. 이런 한계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려면 현재에만 발이 묶여있지 말고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살면서 현재를 보다 긴 시간의 축에서 생각하고 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 하나는 공간을 제발 넓고 또 복합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역사를 찌들려서 살아와서 늘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데만 익숙합니다. 어떤 얘기를 해도 한반도 통일 이상을 넘지 못해요. 그러나 21세기에 정말 우리가 한번 화끈하게 무대 자운데에서 춤 춰 보려면 좋은 의미의 제국적 가슴이나 머리를 가진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국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까요. 결코 남의 나라를 함부로 지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제(帝)자는 원래 신이란 뜻에서 온 것입니다.  좋은 의미의 제국으로서 전 세계에 좋은 의미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가 되려면 쉽게 얘기해서 신처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어야 합니다. 한번이라도 우리가 서울을,  한국을 또는 한반도를 넘어서 본격적으로 공간 운영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아시아인으로 그리고 세계인으로 자유롭게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백지 상태로 오면 차라리  대학 1학년 때부터 제대로 시공간 교육을 시킬 텐 데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1학년생들을 만나 보면 시간적으로 굉장히 짧은 현재와 공간적으로 좁은 한반도에 붙들려 있어요. 1950년대의 기성세대나 1980년대의 386 세대의 시각으로 21세기를 바라다보는 답답함이죠. 이 답답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적으로 좀 길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18세기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았겠어요. 또 22세기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공간적으로도 매일 우리가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에만 찌들어져 있지 말고,  동아시아와는 어떻게 어우러져 살고 지구적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더구나  지구를 넘어서 우주에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 사이버 공간에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생각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이런 생각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서는 이런 생각만 하고 있으면 대학을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공부를 거부하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복합적으로 공부를 하라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여러 분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보다도 매력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전 세계 사람들이 무엇을 부러워하고 무엇에 끌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전 세계 사람들 중에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생각, 활동, 작품들이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돼야겠죠. 그러나 우리가 여러분들을 지금 교육하는 시간과 공간은  과거의 대단히 제약된 시간과 공간에 잡혀 있어요. 내가 386세대를 닫힌 민족주의에 너무 빠져 있다고 자주 지적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죠.  근대 민족주의는  근대국가로서 갖춰야 될 필수 덕목이기 하지만 동시에 상당한 부작용도 발생시킵니다. 그렇다고 부작용이 무서워서 맹목적으로 열린 세계주의로 가자는 것도 아닙니다. 올바른 해답은 한국적 세계인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 맹훈련을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훈련이 필요하겠죠.  대학을 일단 들어오면 언어도 이제 영어만 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세대는 모국어이외에 영어만 알면 그런대로 불편 없이 살았지마는 여러 분들의 시대는 다릅니다.  여러 분들이 좋아하는 가수만 봐도  보아처럼 모국어, 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어, 중국어를 할 수 있어야  아시아의 스타로 또는 세계적인 스타로 뜰 수 있습니다. 우리는 7000천만의 인구로서 한반도의 좁은 땅에서 살면서 엄청나게 큰 상대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인 다역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억울하다고 느껴지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미국이나 중국, 일본이 상대적으로 쉽게 주인공의 배역을 맡을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작은 몸매인 우리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미국이나 중국, 일본 사람들은 한국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런대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기본 원칙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이 사람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만남의 자리를 주도하고, 그들의 머리와 가슴을 꿰뚫어 보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들이 잘 때 우리는 안 자고 준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비극은 우리 중 고등학생들이  안 자면서 공부하기는 하는 데, 안 자면서 공부하는 내용이 21세기적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현실에 적절히 적응해서 빨리 대학을 들어오세요. 강연을 계속해서 들었으면 느꼈겠지만  많은 선생님들이  충분히 여러 분들에게 21세기적 교육을 시키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때에는 21세기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새로운 무대에서 여러분들이 자유롭게 뛰어 놀기 위한  본격적 훈련을 받고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질) ○○중학교 3학년 김은혜라고 합니다. 교수님 말씀 잘 들었고요. 교수님이  19세기에는 통일이 핵심적인 국가 목표가 될 수 있었지만 21세기에는 통신망을 열어서 다 통일해야 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즘 북한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터지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람직한 21세기적 한반도 통일상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21세기에는 남북한의 통일도 네트워크 적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얘기는 통신망을 복잡하게 깔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19세기나 20세기의 근대적 통일은 우리의 살아가는 기본 단위를 하나의 국민국가로 삼는 것인가  굉장히 자연스럽게 느끼잖아요. 그것이 여러분들이 여태까지 받아 온 교육입니다. 이런 생각에 익숙해진 것은 우리경우에는 200년 밖에 안 되었고 서양도 500년 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유럽의  중세는 오늘날처럼 소수의 국민국가 중심이 아니라 500개이상의 다양한 봉건 영주의 성과  무역 및 상업마을을 중심으로 삶이 이루어졌죠. 동시에 로마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 같은  초국가적인 단위도 중세적 삶의 일부로  얽혀져 있었어요. 국민국가 중심의 근대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이상하게 살았죠.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도 오늘의 눈으로 보자면 굉장히 이상하게 살고 있었어요. 한 마디로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 속에서 예의 국가를 기본 명분으로 살았으니까요. 따라서 당시의 나라 개념은 근대 이후의 국민국가 개념과는 상당히 달랐죠. 요즘 처럼 마음대로 국경을 건너면  총으로 쏴 죽이거나  탈북자들처럼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담을 넘을 필요가 없었죠.  조선조 시기에 일본의 왜구가 범람했다고 했는데 그 당시 왜구는 오늘의 근대적 국경 개념 없이 자연스럽게 여러 나라의 해안을 왔다갔다 한거예요. 중세의 외구는 21세기적으로 살았던 것이죠. 

   

19세기에 서양의 근대 국제질서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비로소 근대적 국경 개념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 건설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좌절되고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한반도는 해방과 함께 다시 한번 명실상부한 근대국가의 건설 기회를 맞이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냉전사 전개와 함께 우리는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그 이후 남북한은 다시 하나로 합치기 위해서 협상이나 또는 전쟁으로 통일을 해 또 보려는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최근까지  남북협상이나  정상회담 같은 노력을 계속하고 있으나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19세기적 노력은 21세기적으로는 커다란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네트워크는 단순히 통신망을 얘기 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 그물망을 말합니다.  요즈음 많이 보도되고 있는 개성 단지는 복합 그물망중에  아주 작은 물질적 그물망의 하나죠.  따라서 개성공단은 북한 전체를 그물망으로 엮는 과정의 작은 부분이죠.  꾸준히 그물망을 연결해 나가돼  개성공단의 추진이 바로 남북 정상을 통해서 통일로 성큼 다가갈 수 있으리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남북의 다양한 주인공들이 복합 무대에서 그물망을 치밀하게 짜지 않고서는 21세기에 맞는 통일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21세기의 통일을 생각하려면 남북통일을 넘어 선 통일도 동시에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유럽의 통일을 보세요. 유럽 연합은 최근 회원국 수를 25개국으로 확장했습니다. 미국도 사실은  50개 나라가 합친 연방국가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불공평하죠. 올림픽도 미국은 50개국으로 나눠서 나와야 공평하죠. 우리는 사실 미국의 한주도 감당하기가 어려운 주가 많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를 보세요. 중국도 마찬가지에요. 13억이 한 나라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돼요. 우린 1억도 안되는데  13억 국가와 1대1로 붙자고 하는 것은 애초에 불공평한 게임이죠. 그 것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우리도 당당하게 대결하겠다고 하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것이죠.

  

그러나 유럽의 25개국을 하나의 국가연합으로 성공적으로 엮으려면  25개국에 살고 있는 개개 국민들이 다 유럽시민이라는 생각이 생겨야 가능합니다. 동서독이 합쳐졌지마는 독일이 진정으로 한나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동서독의 국민들이 거미줄처럼 엮여져야 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양쪽이 협상으로 도장을 찍거나 양쪽이 전쟁으로 합치면 금방 통일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21세기적으로 보면 통일은 보다 길게 생각해야 합니다. 통일이라는 말은 보다 조심스럽게 써야 합니다. 하나로 통해가지고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와 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만 생각하면서 21세기의 나날을 지새울 수는 없습니다. 아시아와 연결하고, 지구하고 연결하는 것을 동시에 고민해야 합니다.  남북한의 통일에만 전념하다가 다른 공간과 통하는 것에 실패하면 남북통일은 이뤘지만 19세기처럼 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더 이상 21세기 애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통일은 중요하지만 21세기 적으로 통일을 해야 합니다. 동시에 통일은 아시아적으로 세계적으로 통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남북통일은  21세기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1세기에 남북통일에만 모든 것을 건다는 것은 무대에서 내려오자는 얘기죠. 내가 반통일 세력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새로운 세대들은 통일을 세계 속에서 엮어가는 것으로 생각 하고 늘 더 큰 것과 통하는 것들을 모두 포함한 가운데 남북통일의 위치를 설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질) 주부 임병현(?)인데요. 제가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 나름대로 고민을 해보게 되는데요. 오늘 말씀 중에 교수님은 네트워크 국가건설을 강조하셨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된 나라의 국민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려 해도 아나키스트  운동들이 일어나서 독립운동이 힘들었다는 것을  본 기억이 있어요. 요즘에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대안학교,  생태 균형 운동등과 같은 새로운 변화가 눈에 띄기 시작하고 최근에는 정보혁명에 힘입어 본격적 네트워크 시대로 진입하고 있어서 극단적인 개인주의 경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교수님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답) 네트워크는 반드시 개인주의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그물망을 짠다는 것은 이미 타자와의 연결을 의미하니까요. 부모님들이 생각하시기에 요즈음 젊은 세대는 깨어 있을 때만 아니라  자는 동안도 인터넷에 접속된 상태로 살아가는 인생으로 보이실 겁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삶은 이중적인 면이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접속되어 있는 사이버 공간 자체는 현실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서 굉장히 연결되어 있는 삶이죠. 그런데 인터넷을 하고 있는 개인은 사이버 공간이 아닌 현실 공간에서는 대단히 고독하죠. 사람도 안 만나고 앉아서 컴퓨터만 바라다보고 인터넷 세계 속에서만 연결이 되는 고독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죠.

  

조금 전에 말씀 하신 것처럼  대안학교나 생태 균형 운동은 국가를 너무 강조한 것에서부터 국가를 좀 넘어 서 보자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내가 1시간 반 동안 한국적 세계인이 되자고 얘기 한 것은 세계가 하나처럼  네트워크 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또는 심하게 얘기하면 향후 몇 백년간이나 천 년 동안 우리가 지난 오백년 동안 인간이 만들어낸 국가라는 틀을 완전히 벗어나 살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늑대거미가 되라는 것은 복합적 의미가 있습니다. 늑대는 자기 중심적이지만 거미는 그물망을 통해 모두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네트워크 자체는 반드시 사람들을 개인주의에 함몰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21세기 젊은 세대와 얘기하면서 기대를 가지는 것은 20세기 386세대가 겪었던 역사적인 좌절감이 만들어 낸 반외세 자주의 구시대적 유산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고  21세기의 젊은 세대답게 유비퀴터스 네트워크적인 삶을 살아요. 사이트에 들어가면 어디 국경이 있어요. 순간적으로 자기가 지구 전체하고 늘 접속되어 있는데요.

  

단 이런 문제는 있습니다. 젊은 세대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정보기술이 세계를 얼마나 변화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후배 제자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엮어 낸 책들 중의  하나가 『21세기 한반도 백년대계』이고, 다른 하나가 『변화하는 세계 바로 보기』입니다. 21세기 한반도 백년대계를 고민하면서 정보 기술이 가져다주는  세계 변화를  처음에는  대단히 소박하게 생각해서  사이버 공간이 우리가 사는 현실 공간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대체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따라서 온라인 비즈니스가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전체 비즈니스의 50%를 차지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앞서 가는 미국도 온라인 비즈니스의 비율이 예상보다는 낮아서 아직 전체 비즈니스의 10%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이버 공간이 우리들의 삶속에 자리잡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2004년은 사이버 공간사에서는 기념할 만한 해입니다. 사이버 공간이라는 말을 윌리암 깁슨 (William Gibson)이 본격적으로 처음 쓰기 시작한 지  20년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월드 와이드 웹 (World Wide Web)이 등장한지 꼭  10년 되었습니다. 그러나 온라인 비즈니스가 예상보다 느린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전통적인 오프라인 비즈니스들이 새로운 온라인 비즈니스 방식을 적절하게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21세기 비즈니스에서 살아나기 어렵다는 것도 현실입니다. 대기업도  인터넷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한동안 국내에서 온라인 벤처하면 단번에 신흥 재벌이 될 것으로 기대했었지만 이런 꿈들은 결국은 대부분 거품이었습니다. 따라서 개인에게도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균형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더 이상 사이버 공간을 모르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에서만 사는 경우에 현실 공간의 삶에 문제가 생깁니다. 따라서 두 공간의 적절한 조화가  개인이나 국가에서  모두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조화를 잃어버리는 경우는 개인이나 국가는 낙오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계 내에서 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이버 공간의 나와 현실 공간의 나라고 하는 두개의 나가 잘 조화되어야 하겠죠. 그러나 이것도 세대에 따라서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통계를 봐도  50~60대의 인터넷 이용률은 아직도 높지 않습니다. 하지만 10대~20대로 가면  전 세계 1위의 이용률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령 10대가 인터넷을 통해서 어떤 공간에서 어떤 세계를 보고 사느냐는 것을 우리 기성세대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커다란 숙제입니다. 더 나아가서 현실과 인터넷 공간의 적절한 균형을 어떻게 잡아 나가느냐 하는 것은  21세기 개인으로도 그렇고 국가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질) 사대부고(?) 재학 중인 강호균이라고 합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LA 북한발언에 대한 교수님의 시론을 읽었는데요. LA 북한발언에 대해서 악수(惡手)라고 말씀하시면서 특사교환이나 정상회담을 통한 노력들이 위기 국면의 해소 직후에 이루어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해서 좀 질문이 있습니다.  외교란 것이 위기국면이 닥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중요한데  특사교환이나 정상회담 없이 북핵 위기의 악화를 줄이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을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런 것을 조용한 예방외교라고 표현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방안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인지 답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답) 그 바쁜 시간에 칼럼을  읽은 게 용합니다. 내가 쓰는 칼럼에 대해서 대부분 독자들은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합니다. 지금 질문 한 칼럼에 대해서도 실무 담당자들은 노대통령 얘기보다 더 어려워서 잘 모르겠다고 농담을 해요.  그러면서 칼럼 제목이 “잘못짚은 LA 북핵 발언”이었는데, 이 번은 하 교수가  잘 못 짚은 것 아니냐고 물어요. 미국 부시 행정부의 반응도 예상했던 것 보다 그렇게 나쁘지 않고  핵문제를 돌파할 가능성을 높인 것 아니냐는 것이죠. 바둑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 연설을 여전히 악수라고 생각하고 있고, 차라리 내 판단이 악수이기를 바랍니다.

  

조금 어려운 질문인데 왜 특사교환이나 정상회담을 북한이 전략적 선택을 한 직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 하며, 왜 로스엔젤레스 연설같은 내용의 얘기는 현단계가 아닌 다음 단계에서 하는 것이 옳은 수순인가 하는 얘기입니다. 현재까지의 진행을 보면 우선 미국의 반응에 대해서는 내 전망이 맞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악수라고 한 이유는 한마디로 해답이 없는 현 단계에서 우리가 맞는다고 제시 한 해답을 북한이나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스엔젤러스 연설이후 산티아고에서 부시대통령과 우리 대통령하고 밝은 웃음으로 악수를 했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미국이 우리의 입장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측 얘기로는 미국은 한국 얘기를  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쌍방의 진화 노력으로 그 얘기는 원칙적으로 산티아고에서는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까 말한 것처럼  외교는 앞에서 악수하면서 하는 얘기와 문 닫아 걸고 뒤에서 하는 얘기는 대부분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합니다. 19세기 한국 외교사를 공부해 온 입장에서 대부분 공식적으로 앞에서 한 얘기와 뒤에서 나중에 문서로 정리된 자기네들끼리 한 얘기는 전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번 경우도 미국은 우리가 제시한 해답을 전혀 해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현 단계에서 북한은 문 닫아걸고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만약 북한도 우리 얘기를 해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경우에는 남북한간에 특사 교환이나 정상회담이 이루어져도 실질적인 결실을 맺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데 북한이 왜 한국 특사나 정상을 만나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만날 수가 있죠. 바둑을 두는데 상대방을 따 먹기 위한  수만 두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패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특사나 정상회담을 하지말자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실제 북한의 패 감으로 허비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대마의 사활이 걸렸을 때, 대마를 확실히 살리기 위해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내 놓은 해답대로 쉽게 됐으면 좋겠는데 현실은 다릅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현 단계에서는 미국은 문 닫아 걸고는  한국이 내 놓은 해답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을 겁니다. 한 마디로 북한을 잘 못 보고 있다는거죠.  한편 북한은 문 닫아 걸고 한국이 기대하는 것처럼  미국이 쉽게  바뀔 가능성은 없다고 평가하고 있겠죠.  미국이 어떤 제국주의인데 그렇게 쉽게 입장을 바꾸겠냐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북한과 미국으로부터 영원히 소외당할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양쪽이 상대방을 억압하기 시작해서 망하냐. 안 망하냐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가 얘기하고 싶어 하는 대안의 모색이 의미를 가지게 되겠죠. 그 때  우리가 한계 안에서 해야 할 역할이 생길 겁니다.

  

현 단계에서는 북한이나 미국이나  우리나 해결책이 없습니다.  해결책이 없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결책이 생기냐는 것입니다. 해결책은 생길 수 있습니다.  북한과 미국이 서로 버티고 위협하면서 상황이 더 긴박해  지면 어느 한 쪽 또는 양쪽이 결국 선택을 하게 됩니다. 북한이나 미국은 지금은 마지막 선택을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미리 답을 마련해서 이것이 해답이라고 하는 경우에 양쪽은 아직 수가 늘어져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답안 제출 시간을 잘 못 잡았다는 의미로 내가 잘못 짚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답안 작성이나 정상회담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시기 선택과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전략적 선택을 하기 전까지는 조용한 예방 외교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공개 발언이 아니고, 조용한 외교로서 양쪽한테 대안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적절한 시기에 우리 의견을 최대한 반영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어려운 질문에 대해 생각보죠. 국제정치는 말로 하는 무대인 동시에 말로만 연기할 수 없는 무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말로 혼내 줄 수 있는 국제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상대방이 정말 혼이 나서 말을 들을 것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현실 국제정치는 비정한 세계이기 때문에  바로 보고 바른 말만 하면  되는 게 아니고 바로 하기가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전략적 선택이 이루어지기 전 단계에 우리는 일단 말의 국제정치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말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한 사람의 상대방을 움직이는 것도 어렵습니다.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그리고 여러분들이 부모님의 의사를 바꾸는 것만 해도 대단히 힘듭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요. 매를 들거나 용돈을 주거나 말로서 설득을 하거나 가슴에 감동을 불러 일으켜서 따르게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상대방 국가를 감동의 눈물이나 세치 혀로만 설득하거나 감동시켜서 따르게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죠. 현재까지 부국강병의 세계에서는 부와 병이 국제정치를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21세기 무대에서는 부강과 함께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힘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말의 국제정치가 현실의 국제정치가 되려면 이러한 힘들을 제대로 기르고 또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기성세대는 그 동안 부국강병 즉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우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여러 분 젊은 세대는 그  기반 위에 21세기의 새로운 힘들을 더 키워야 합니다. 한반도라는 조그만 공간의 여러분들이 세계라는 무대의 주인공이 되려면 21세기에 맞는 복잡한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 대통령이 영국이나 불란서에 가서 대접 받는 핵심 이유는 밤 잠 안 자고 일하는 산업 전사들의 노력으로 달성한 세계 10위권정도의  우리 경제력 덕택이죠. 그것이 적어도 20세기에 대우 받는 힘의  중심 내용이었죠. 그러나  21세기에는 그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김구 선생이 『우리의 소원』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강대국에 둘러 쌓여 있는 우리는  군사력과 경제력의 추구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21세기에는 정보/지식력, 문화력, 생태 균형력 같은 새로운 매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매력은 군사력이나 경제력과 비교해 보면 우리가 상대적으로 덜 불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을 넘어선 매력, 그것이  새 세대가 고민하고 풀어야 할 21세기 최대의 화두입니다. 어떻게 세계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꽃피우느냐 하는 것이죠. 

  

내가 1~2학년의 어린 제자들을 보고 자주 지적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늙은 대학생으로 대학 생활을 보내느냐는 것입니다. 적어도 전 세계 어느 고등학생들 보다도 밤 잠 안 자고 노력해서 대학을 왔으면 전 세계 대학생들 중에 아프리카나 아시아는 물론이고 미국이나 유럽의 대학생들이 한번쯤 한국의 대학생들을 궁금 해 하고 또 보고 싶어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기 유학이 늘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게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즐기는 매력의 대학생활을 우리가 못 할 이유가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대학입시 공부하던 여러 분들의 노력과 부모님들의 정성을 합치면  얼마든지 세계적인 매력 대학생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대학에 몸담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오늘의 대학은 정확하게 한국의 20년 앞을 미리 보여 주는 곳입니다. 지금 2000년대에 일어나는 사태가 1980년대 내가 관악산에서 겪었던 바로 그 모습입니다. 따라서 2020년이 어떤 모습일지는 대체로 상상이 갑니다. 관악산, 신촌, 또는 안암골등을 비롯한 오늘 한국 대학의 모습이 2020년 우리의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일본이나 중국 대학생들이 한국 대학생들을 부러워하면 2020년에 일본이나 중국이 우리를 부러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으로 지금 베이징대학교나  칭화대학교를 가 보면 장난이 아니에요. 우리는 착각으로 중국이 바짝 따라와서 걱정이라고 하는데 중국은 이미 우리와 같은 경기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확하게 우리 자신을 알고 지나치게 비관하지 말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청년으로 성장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어떻게 자식들을 그런 방향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시느냐가 중요하겠죠. 이러한 노력의 작은 시작이 근현대사 바로 보기이고 궁극적으로 한 개인의 미래사 바로 만들기입니다. 나아가서는 한국의 미래사 바로 만들기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아시아의 미래사 바로 만들기나 전 세계의 미래사 바로 만들기와 단절해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안목을  노·장·청이 함께 갖출 수 있을 때 2020년의 우리는 희망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2020년의 우리 미래는 굉장히 어둡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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