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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세계와 개념사
 

2005-01-10 

21세기의 세계는 문명사적 변화의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다. 근대의 오랜 주인공이었던 국민국가는 안과 밖에서 새로운 주인공들과 새롭게 무대를 꾸며나가고 있다. 지구 기업이나 세계무역기구나 세계금융기구들은 더 이상 국민국가의 단순한 조연으로만 취급하기 어렵다. 9.11의 충격을 가져다 준 지구 테러 그물망은 가장 주목할만한 신인 연기자로 급격하게 부상했다. 회원국이 25개국으로 늘어난 유럽연합도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국가 밖의 변화 못지않게 안의 변화도 새롭다. 시민사회조직은 목소리를 하루가 다르게 높이고 있으며, 그물망을 지구공간으로 넓혀가고 있다. 개인의 역할도 새로워지고 있다.

 

주인공만 변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대도 바뀌고 있다.  근대 국민국가의 주무대였던 일국중심의 부국과 강병의 현장은 국가의 안과 밖을 동시에 포함하는 안보와 번영의 무대로 새로 꾸며지고 있다. 동시에 정보기술 혁명에 따른 지식무대, 생각과 행동의 차별화를 보여 주는 문화무대, 산업화의 자연 파괴를 극복하기 위한 환경무대, 근대의 점과 선의 외교를 넘어 선 그물망 외교무대의 비중이 눈에 띄게 커지고 있다.

 

주인공과 무대의 변화에 따라 연기의 내용도 바뀌고 있다. 근대 국민국가는 부국과 강병의 무대에서 홉스가 말하는 외로운 늑대처럼 일국중심의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과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리고 최소한의 협력을 도모했다. 주인공과 무대의 복합화에 따라 국가는 더 이상 최대한의 자주와 최소한의 협력을 추구하는 늑대의 연기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새롭게 거미의 연기를 배우기 시작하고 있다. 국가의 안과 밖에 새롭게 등장한 주인공들을 그물망으로 엮어 나가고 있다. 동시에 안보와 번영의 무대와 새롭게 등장한 무대들을 그물망으로 함께 엮고 있다. 근대국가가 늑대거미의 새로운 연기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21세기 역사의 주인공은 과거의 체험과 미래의 지평사이에서 현재의 지속과 변화를 바로 보고 미래를 제대로 꾸며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변화하는 오늘을 제대로 들어내고 미래 행동을 방향 짓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는 개념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21세기의 예비 주인공들은  21세기의 변화하는 모습을 여전히 기본적으로 국제관계, 국민제국관계로 품어야 할지, 아니면 제국관계, 그물망관계로 읽어야 할지의 논쟁을 본격화하기 시작하고 있다. 

 

개념 논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등장하는 개념 변화와 사회 구조의 역사적 변화를 겪으면서 진행된다. 서양 근대의 등장은 신을 중심으로 하는 개념을 넘어서서 새로운 개념의 탄생을 필요로 했다. 근대적 자기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탈근대적 몸부림은 또 한번 새로운 개념의 모색이라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중세와 근대, 근대와 탈근대의  개념 논쟁은 국제 및 국내의 정치 사회구조의  변화와 결합해서 보다 치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전초전인 개념 논쟁이 본격화되고 있는 속에서 한국은 3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미래의 변화를 과거의 개념으로 읽어내려는 어려움이다. 오랫동안 중국 천하질서의 명분 속에서 익숙해져 있던 한반도는 19세기 중반 문명사적 변환을 맞이하여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 유럽의 근대 국제질서 개념들의 전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근대국민국가의 부국강병 경쟁이라는 기본 개념으로 세계의 지속과 변화를 읽어내는데 간신히 익숙해 진 한국은  21세기의 문명사적 변화의 가능성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새로운 개념들의 전파 싸움을 치루기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전통 개념으로 근대의 변화를 담아야 하는 어려움이며, 근대의 개념으로 미래의 변화를 품어야 하는 갈등이다.

 

한국이 겪고 있는 개념 전파전쟁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새로운 개념의 각축에서만 전선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의 전선은 정치 사회 구조의 변화 에서 형성되고 있다. 정치 사회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일차적으로는 국가간에 이차적으로는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다. 개념 논쟁은 근대이래 국제정치의 중심국과 주변국간의 전파와 변용이라는 틀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부국과 강병의 기반위에 근대 국제정치의 주인공을 다투었던 유럽의 중심 국가들은 의미권의 지구적 확대를 통해 국제질서의 보다 효율적 운영을 추진했다. 21세기 세계정치의 중심 국가 위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미국을 비롯한 구미국가들은 세계질서의 변환을 품기 위한 새로운 개념들의 전파를 다시 한번 주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전파의 중심 국들에게는 이러한 개념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느낌에 잘 맞는 맞춤복이라면, 한국과 같은 전파의 주변국들에게는 이러한 개념들이 기성복일 수밖에 없다. 맞춤복과 기성복의 차이는 단순히 몸매를 얼마나 멋있게 들어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미래의 몸과 머리와 마음의 키워나가는 방향을 결정짓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한국의 개념 논쟁은 국내의 정치 사회세력간에도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다. 전파 중심 국들의 개념들을 받아들여 쓰는 과정에서 국내의 정치 사회세력들은 전통의 무게, 현재의 정치 경제적 이해, 미래의 전망 등의 영향 속에서 각자 다른 형태로 개념들을 변용하려는 노력을 해 왔다. 19세기 한국의 위정척사파들은 가능한 한 전통 개념으로 폭풍처럼 불어 닥치는 근대의 변화를 품어 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개화파들은 일본과 중국을 징검다리로 해서 보다 과감하게 유럽의 근대 정치 사회개념들을 받아 들여 문명사적 변화를 이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꿨다. 현실의 국내정치는 양 극단의 갈등을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를 통해 풀어 보려는 어려운 노력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21세기 문명사적 변화의 가능성을 맞이하면서 국내의 정치 사회세력들은 다시 한 번 세계화론과 반세계화론의 경직화된 갈등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한국적 세계화라는 변환론의 해답을 놓치고 있다.

 

21세기 한국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바로 읽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해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화려한 연기를 선보이려면 전초전인 개념 전쟁부터 제대로 치를 수 있어야 한다. 그 첫 걸음은 개념사 연구부터 시작해야 한다. 21세기를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 우리 나름의 개념을 갖추려면 우리의 전통 개념이 19세기 중반이래 3중 개념전쟁을 통해서 어떻게 오늘의  근대개념으로 바뀌어 왔는가를 조심스럽게 추적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21세기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핵심 정치 사회개념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비로소 변화하는 세계를 품기 위해서 허겁지겁 전파의 중심국들이 재빠르게 생산하고 있는 새로운 개념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입하는 대신에 21세기 한반도에 맞는 개념들을 3면전의 어려움을 충분히 고려하여 조심스럽게 궁리하게 될 것이다.

 

한반도 개념사의 심층 구조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라인하르트 코젤레크 (Reinhart Koselleck)중심의 개념사(Begriffsgeschichte)연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 전후해서 독일을 중심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한 개념사 연구는 단순한 개념의 역사적 지속과 변화를 다루고 있지 않다. 독일 개념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구미에서 진행되어 온 어원사, 지성사, 또는 사상사와 비교하여 사회사와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개념사를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념사는 인간을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전망 속에 현재를 개념화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존재로 보고 있다. 따라서, 개념사와 사회사를 결합함으로써 살아있는 전체 역사의 모습에  보다 접근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코젤레크는 “사회사와 개념사”라는 논문에서 상호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회사와 개념사는 서로 다른 속도로 변환하고 있으며, 서로 구별되는 반복의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사의 학술용어는 언어로 축적되는 경험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개념사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개념사는 결코 다리 놓을 수 없는 사라져 버린  현실과 언어적 증거의 차이를 계속 보려면 사회사의 결과에 의존해야 한다.”   

 

독일 개념사 연구는 1970년대에 들어서서 눈에 띌만한 성과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들로는 코젤레크가 중심이 돼서 편집한 “독일의 근대 정치 및 사회 개념사 사전”과 같은 기념비적 업적을 비롯하여, 요하임 리터 (Joahim Ritter)와 칼프리드 그뤼더( Karlfried Grüder)가 편집한 “철학사 사전”과 롤프 라이히아르트 (Rolf Reichardt)와 에버하르트 슈미트 (Eberhart Schmitt) 편집의 “프랑스 정치 사회 기본개념 핸드북”등을 들 수 있다.

 

코젤레크의 사전은 독일이 본격적으로 근내의 변화를 겪었던 1750년부터 1850년 사이에 독일어 사용 유럽의 정치 사회 개념들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본격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이 사전은 115개의 기본적 독일 정치 사회 개념을 선정해서 한 개념당 평균 50페이지 이상의 방대한 설명을 붙여 모두 9권으로 만들어 졌다. 저자들은 개념들의 역사적 의미 변화를 세장으로 나눠서 분석하고 있다. 우선 1장은 고대부터 근대초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다음 2장은 가장 긴 장으로서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3장에서는 현대를 다루고 있다.

 

독일 개념사연구는 1990년대에 들어서서 보다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핀란드의 개념사연구의 대표주자인 카리 팔로넨 (Kari Palonen)과 영어권에 본격적으로 독일 개념사연구를 소개한 멜빈 리흐터 (Melvin Richter)가 중심이 되어 1998년 6월에 핀란드의  후원아래 유럽중심의 14개국 개념사 연구자들이 런던에서 모여 “정치 사회 개념사 그룹”을  결성하고 개념사를 전세계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리흐터는 창립 모임의 개회사에서 개념사연구의 시간과 공간 비교 연구를 강조하면서 특히 한 문화로부터 다른 문화로의 개념이전의 체계적 연구가 비교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팔로넨을 비롯한 핀란드의 개념사 연구자들은 중심이 아닌 주변의 개념사연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이러한 시도가 동아시아에서는 현재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개념사의 시각에서 19세기 일본과 중국이 유럽의 근대 개념들을 어떻게 받아 들였는가를 분석한 구미의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일본 나름의 기초적 연구가 있기는 하지만,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개념사 연구 수준은 아직까지 초보적인 어원사 또는 개념전파경로 연구사의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비교적 자명하다. 동아시아는 자신들의 전통 정치 및 사회 현실과의 갈등 속에서 유럽의 근대 정치 및 사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근대 정치 및 사회 개념들을 자신들의 전통 언어로서 번역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개념사 연구는 유럽의 근대 개념사 및 사회사와 동아시아의 전통 개념사 및 사회사의 복합화를 분석해야 하는 이중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개념사 연구는 절실하게 필요하다. 21세기 변화하는 세계를 바로 보고 바람직한 미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19세기이래 전통 동아시아가 유럽의 근대 국제 정치 사회 개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에 이르렀는가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21세기의 새로운 변화를 맞이해서 오늘의 근대 개념으로 변화를 충분히 품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것인지,  또 한 번 내일의 새 개념을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또는 근대와 탈근대를 복합화한 한국형 변환의 개념을 조심스럽게 만들어야 할 것인지를 판단 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정치의 개념사 특집은 근대 한국이 새롭게 닥아 온 구미의 근대 국제질서의 주인공, 무대, 연기의 내용을 제대로 보고 자신의 미래를 실천할 수 있도록 어떤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서양의 근대 국제질서 개념들을 받아들였는가를 조심스럽게 검토하고 있다.

 

신욱희는 근대 한국이 근대 국제질서의 핵심 개념인 주권을 19세기후반과 20세기 초에 걸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주권 개념이 한국에 처음 전해진 것은 마틴의 국제법 번역서인 만국공법(1864)의 전래와 함께였다. 1880년에 들어서서 한성순보의 번역기사에 주권이라는 용어가 자주 나타나고, 유길준은 서유견문(1887-1889)에서 당시의 주권개념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1890년대 후반 독립신문은 형식적 주권과 실질적 주권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이 유럽의 근대 국제질서의 명분 개념이었던 주권 개념을 제대로 이해한 기반위에 대외 관계의 변화를 바로 읽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기 어려웠던 현실을 김윤식, 유길준, 윤치호의 주권관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김영호는 근대 한국이 근대 국민국가의 활동 목표였던 부국강병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국왕과 집권세력들의 유교적 부국강병관은  부정적이었다. 유교적 부국강병 개념이 근대적 부국강병개념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대원군 집정 10년, 고종 친정 10년, 갑신정변이후 시기로 나누어서 점차적으로 전통적 부국강병관을 넘어서서 근대적 부국강병관으로의 인식 전환이 이루러져 갔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국내외적 제약을 넘어서서 주변국들과 괄목상대할 만큼 명실상부한 부국강병의 실현에 실패함으로써 국망의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장인성은 근대 주권국가가 일국중심의 부국강병을 경쟁적으로 추진하는 근대 국제질서의 기본 작동 원리인 세력균형 개념을 근대 한국이 서양의 근대 국제질서와 만나면서 언제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가를 치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근대한국이 세력균형을 균세라는 번역어로서 받아들인 것은 마틴이 번역한 만국공법의 전래와 함께 이었다. 균세가 개념으로서 정착하게 된 것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둘러 싼 국내 논쟁과 함께 이었다. 균세 개념을 수용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유교이념의 전통, 현실적 힘의 역학관계의 장소성 때문에 권력론으로서의 세력규형론이 아닌 규범론으로서의 세력균형론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더구나 자강에 기반을 둔 세력균형을 주체적으로 운용할 수 없었던 근대 한국은 세력균형 개념의 변용으로서 외재적 세력균형으로서의 중립과 지역 내재적 세력균형으로서의 정립 개념을 모색하였으나 가시적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김용직은  근대 국민국가의 중심 개념인 민주주의가 그대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검토하고 있다. 1880년대 초반에 한성순보 등을 통해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소개되었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사상적 수용이나 제도적 수용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시민단체 성격의 결사체인 독립협회가 등장하면서 실질적인 서양 민주주의 개념의 본격적 수용이 시작됐다. 그러나 국내 보수 세력의 반대, 제국주의적 외세의 개입, 낙후된 대중 정서 등의 장애물 때문에 민주주의 개념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반세기를 지난 후 비로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헌미는 국운이 쇠해 가는 대한제국 기에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영웅 개념의 도입을 주목한다. 대한제국의 영웅 개념은 중국의 량치차오를 매개로 수용된 메이지 일본의 영웅개념에서 기원한 것이다. 19세기 동아시아의 영웅 개념은 사회진화론과 민족주의의 사상적 영향아래 국가 발전과 사회 변혁의 원동력으로서 근대적 주체의 새로운 모습을 담고 있다.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의 영웅론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우승열패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보여  준다. 영웅은 시세에 의해  탄생하는 존재였다. 무명 영웅의 윤리 덕목은 정치보다는 경제였고 문화였다. 청의 량치차오는 진화론의 기계적 결정론을 부정하고 ‘시세를 만드는 영웅’을 역설하였고, ‘유명의 영웅’을 대체할 ‘무명의 영웅’의 잠재력에 주목했지만, 현실의 제약 앞에서 개명전제의 입장으로 돌아갔다. 한편, 국망을 눈앞에 둔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은 양계초보다 더 ‘시세를 만드는 영웅’을 강조하고, 나라를 구할 정치 주인공으로서 ‘무명의 영웅’을 갈망하였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의 한국정치담론에 여전히 영웅 개념은 살아 있다.

 

손열은 근대한국이 근대국민국가를 군사와 함께 떠받치고 있는 경제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유럽 근대국가의 경제 개념은 국가를 단위로 한 재화의 생산 증대를 일반적으로 의미했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부국이라는 개념은 익숙하지 않았다. 일본의 경우 전통적 경제 개념 (경세제민)은 오규 소라이로 대표되는 토쿠가와 유학의 변질, 란가쿠의 영향아래 흔들렸고, 19세기 중엽 economy의 번역어가 됐다. 메이지 지배세력은 부국강병을 내 걸고 부국은 식산흥업, 즉 산업의 육성을 통한 생산의 확대와 교역이란 국제표준을 받아들였다. 한편, 근대 한국은 중국과 일본을 거치거나 직접 서양을 접촉하면서 부국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1880년대의 유길준과 박영효의 자강으로서의 경제관은 주어진 재화의 관리와 상업 장려라는 초보적 수준에 머물렀다. 이러한 경제 개념은 1890년대와 1900년대 초반까지 커다란 변환을 겪지 못했다. 러일전쟁이후 뒤늦게 식산흥업론이 등장하게 돼나 더 이상 국가의 보호 하에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없었다.

 

근대한국이 19세기의 변화하는 세계를 바로 보고 미래를 제대로 마련하기 위해 유럽의 근대 국제질서의 기본 개념들인 주권, 부국강병, 세력균형, 민주주의, 영웅, 경제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넓은 의미의 개념사적 시각에서 검토한 결과 우리는 당시 개념 논쟁의 삼면전에서 완패했음을 보여 준다.  우선 19세기의 문명사적 변화를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전망속에서 제대로 개념화하는데 실패했다. 위정척사파는 미래의 전망을 제대로 내다보는데 실패했으며 개화파는 과거 경험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봐서 실패했다.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를 통한 보다 입체적 시각으로 변화의 의미를 바로 읽고 미래를 균형감있게 꾸며 나가려는 애국 계몽기의 뒤늦은 노력은 더 이상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19세기 근대 국제질서 무대에서 주연급 주인공들은 일차적으로 부국강병의 무대에서 경쟁에 승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국제질서의 기본 개념들을 전 세계적으로 전파하여 의미권을 확대함으로써 효율적인 국제질서 운영을 모색했다. 무대의 중심이 아닌 주변에 서 있었던 근대 한국은 기본 개념의 강대국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 함으로써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개념으로 변화를 재단하고 비현실적 미래를 꿈꾸는 비극을 맞이했다.

 

근대 한국의 국내 정치  사회세력들은 지나치게 양극화되어 국내 전선의 격화를 불러 일으켰으며, 따라서 19세기의 문명사적 변화를 균형감있게 개념화하지 못하고 문명 주도국들의 국제적 개념 전파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근대 한국의 국내정치적 갈등은 당면하고 있던 문명사적 숙제나 국제정치적 숙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 채 심화되었으며, 이를 조정하기 위한 국내정치가 실질적인 성과를 못 거둠에 따라 근대 국제정치 무대에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말은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비극속에 근대 한국은 정치, 군사, 외교, 경제의 독립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을 스스로 개념화하고 미래를 실천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하게 되었다. 해방과 함께 현대한국은 비록 분단된 모습이지만 다시 한 번 세계정치의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한국은 지난 반세기동안 무대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키워 나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가시적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개념화의 식민성에서는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정보화의 세기를 맞이해서 오히려 더 심화될 위험성도 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21세기 한국은 다시 한 번 문명사적 변화의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다. 개념화의 21세기적 식민성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21세기의 변화를 어설프게 개념화하고 미래를 꾸며 나가려고 하면, 우리는 19세기적 21세기의 난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첫걸음은 본격적인 한국의 개념사연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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