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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67] 북한 1972 진실 찾기: 7.4 공동성명의 추진과 폐기
 

2014-03-27 

I. 머리말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악몽 같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질서의 형성 과정에서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고 한국전쟁이라는 세계적 규모의 비극을 맞이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냉전질서는 본격적으로 지구 차원에서 군사 대결의 모습으로 건축되기 시작했다. 미소의 치열한 각축 속에서 새 건축물은 단단하게 지어져서 쉽사리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질서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축의 변화를 겪게 된다. 지구 차원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긴장관계의 완화라는 데탕트를 시도하고 동아시아 차원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역사적 관계개선에 접어들고 중국과 일본은 국교정상화를 이루게 된다.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휴전상태에 머물러 있던 한국과 북한도 1971년 8월부터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해서 다음 해인 1972년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에 기반을 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미니 데탕트는 오래 가지 못했다. 공동성명 실천을 논의하기 위해 10월에 열린 제1차 남북 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부터 커다란 시각 차를 보이기 시작하여 결국 세 차례의 공동위원장회의와 조절 위원회를 통해 상호 이견을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1973년 8월 28일 북한은 사실상 <7.4 남북공동성명>의 폐기를 선언했다. 한반도 미니 데탕트의 추진은 2년 만에 한 여름 밤의 꿈같이 깨졌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꿈을 뒤늦게나마 21세기에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미니 데탕트의 핵심이었던 <7.4 남북공동성명>이 어떻게 추진되고 또 폐기되었는가를 제대로 복원해 보려는 노력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연구는 <7.4 남북공동성명>의 추진과 폐기를 복원하기 위해서 현대 팝 아트의 대가인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고향인 영국 동요크셔의 월드게이트(Woldgate) 숲길을 입체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 쓴 방법을 빌려 왔다(Hockney 2010). 호크니는 2010년 11월 자동차 앞에 부착한 아홉 대의 비디오 카메라로 각각 각도를 달리하여 고향 숲길을 한 화면으로 구성해서 연속 촬영한 후 최종적으로 맑은 날과 눈 내린 날의 두 화면을 대비시키는 시도를 했다. “1972 한반도 2014”의 공동연구도 한국, 북한, 미국, 중국, 소련 그리고 일본이라는 여섯 대 카메라를 사용하여 1972년 한반도 미니데탕트의 좌절과 2014년의 상황을 대비적으로 촬영하여 오늘날의 한반도를 입체적으로 조명해 보려는 것이다.


이 글은 여섯 대의 카메라 중에 북한 카메라의 시야에서 1970년대 초 한반도 미니데탕트의 촬영을 시도한다. 다른 카메라에 비해서 찍을 수 있는 피사체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폐쇄적인 북한 정치권력이 남겨 놓은 최소한의 자료들을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시야 융합(fusion of visions/Horizontverschmelzung)을 원용한 해석학적 렌즈로 촬영하여 1972년 북한의 진실 찾기를 시도해 보려고 한다(Gadamer 1989, 298-306; 578-579). 그 첫 단계로 1971-1973년 김정일을 주축으로 한 북한 정치권력의 시야 형성에 핵심적 영향을 미친 1964년 이래 3대 혁명역량의 과거시야를 요약하고, 둘째, 1970년대 초반 북한이 당면하고 있던 3대 혁명역량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7.4 남북공동성명>을 선택했으며, 셋째, 북한이 3대 혁명역량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면서 <7.4 남북공동성명>을 폐기했는가를 해석하게 될 것이다.

 

II. 3대혁명역량 시야의 영향

 

1972년 7월 4일 아침 10시. 서울과 평양은 지난 5월 한국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그리고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한 것을 각각 동시에 밝히며,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천명하고, 긴장상태를 완화하며 다방면의 교류를 실시하고, 남북조절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는 내용의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적대국가로서 양국 핵심 권력의 만남은 쉽사리 상상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북한이 제의한 통일의 3대 원칙에 한국이 원칙적으로 합의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우선 북한이 <7.4 남북공동성명>을 추진하게 된 배경적 진실을 찾기 위해서 1970년대 초 북한 시야가 1960년대 3대혁명역량 시야의 영향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추적하기로 한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의 적대 관계는 쉽사리 개선되기 어려웠다. 통일을 위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남북한의 공통된 인식은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서 새로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64년 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8차 총회에서 “조국통일의 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혁명역량을 백방으로 강화하자”라는 연설에서 처음으로 3대 혁명역량 강화로 조국통일을 실현하자고 선언하고(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964) 구체적 방법을 1965년 4월14일 인도네시아 알리 아르함 사회과학원에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과 남조선 혁명에 대하여”라는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김일성 1965/04/14).

우리 조국의 통일, 조선혁명의 전국적 승리는 결국 3대력량의 준비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잘하여 우리의 혁명기지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더욱 강화하는 것이며, 둘째로, 남조선인민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튼튼히 묶어 세움 으로써 남조선의 혁명력량을 강화하는 것이며, 셋째로, 조선인민과 국제혁명력량과의 단결을 강화하는 것이다.

 

북한의 전쟁통일이라는 시야가 1960년대의 새로운 상황을 맞이해서 혁명통일이라는 시야로 변모 하게 된 것이다. 김일성은 이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3대 혁명역량 강화를 기반으로 한 통일 방안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민족적 량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정권에 들어앉아 미군 철거를 주장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하며 민주주의적 자유를 보장하는 조건이라면 그들과 언제 어디서나 평화적 조국통일문제를 가지고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루차 표명하였습니다. …… 우리는 남조선에서 미제 침략군대를 몰아낸 다음 남북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이고 서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데 대한 협정을 맺으며 남북 사이의 경제 문화 교류와 인사왕래를 비롯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며 조선인민의 자주적 의사에 따라 평화적 방법에 따라 조국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본조건이 마련될 때 자유로운 남북조선 총선거를 실시하여 민주주의 통일정부를 세울 것을 남조선 당국에 여러 번 제의하였습니다. …… 남조선에 미제 침략군대와 현 괴뢰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나라의 평화통일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조국의 통일을 가로 막는 기본장애물인 미제침략자들을 남조선에서 몰아내고 그 식민지 통치를 청산하며 현 군사파쑈 독재를 뒤짚어 엎고 혁명의 승리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남조선에 참다운 인민의 정권이 서면 공화국 북반부의 사회주의 력량과 남조선의 애국적 민주력량의 단합된 힘에 의하여 우리 조국의 통일은 순조롭게 실현될 것입니다.

 

북한의 1970년대 초 통일방안은 첫 단계로, “미제침략군대와 현 괴뢰들”을 몰아낸 다음, 둘째 단계로,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정부와 군비축소, 무력불사용협정, 다양한 교류협력 조치를 취하고 자주 의사에 따라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본조건을 마련하며, 마지막 단계로 한국에 인민정권이 수립되면 북한의 사회주의 역량과 한국의 애국적 민주역량의 단합된 힘으로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허담 외무상은 1971년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제4기 5차 회의에서 “현국제정세와 조국의 자주통일을 촉진 시킬데 대하여”라는 보고에서 다음과 같은 ‘통일 8개항’을 제시했다(허담 1971/04/12).

첫째, 남조선에서 미제침략군을 철거시키는 것입니다. 둘째, 미제침략군이 물러간 다음 남북 조선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이는 것입니다. 셋째, 남조선괴뢰정권이 외국과 체결한 모든 매국적이며 예속적인 조약들과 협정들을 폐기하며 무효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넷째, 자주적으로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적인 중앙정부를 세우는 것입니다. 다섯째,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위하여 정치활동을 벌릴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며 남조선에서 체포, 투옥된 모든 정치범들과 애국자들을 무조건 석방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완전한 통일에 앞서 필요하다면 현재와 같은 남북의 각이한 사회제도를 그냥 두고서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조선연방제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남북간의 통상과 경제적 협조, 과학, 문화, 예술, 체육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호상교류와 협조를 실현하며 남북 간의 편지거래와 인사래왕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여덟째, 이상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각 정당, 사회단체 들과 전체 인민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써 남북조선 정치협상회의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북한은 1971년 6월 10일 평양을 방문한 루마니아 당정대표단에게 남북한의 분쟁 발생은 반드시 소련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미국을 개입시킬 것이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아시아 분쟁은 지구 규모의 전쟁을 촉발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유관국 모두가 전쟁을 조심스러워 하고 있으므로 북한은 전쟁적 방도로 통일을 추진하는 대신 혁명적 방법의 ‘통일 8개항’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박정희가 무너지면 우리는 우리나라의 통일을 이를 원하는 누구와도 협의할 수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남조선 상황의 전개는 남조선 민주세력과 인민의 투쟁에 달려 있다.”라고 강조했다(Woodrow Wilson Digital Archive 1971-1972).


III. 7.4 남북공동성명의 추진

 

김일성 수상은 빠르게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남조선혁명의 실현과 조국 통일을 위한 평화공세”를 취하고자 1971년 8월 6일 연설에서 한국의 집권당인 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단체들과 협의하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국제혁명역량의 강화를 위한 평화공세로 “아시아인끼리 그리고 한국인끼리 싸우도록 하려는 닉슨 독트린을 좌절시키고, 한국군 근대화를 지원하고 한반도 분단을 지속하고 한국을 군사기지화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맞서고, 일본의 한국 침투를 좌절시키고, 한미일의 협력을 막을 것”이라고 설명했다(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h).


북한은 평화공세의 목적을 국제혁명역량의 강화와 더불어 남한의 혁명역량강화에 두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평화공세의 또 하나의 목적은 남한 파시스트 억압의 제거다. 남한괴뢰정부는 북한의 남침계획을 핑계로 남조선인민들에게 파시스트 억압을 강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북한은 남침 의도가 전혀 없다. 이것을 남조선 인민들에게 증명해야 한다. 동시에 남조선 정부에게 인민과 민주세력들을 억압하려는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 남한 혁명역량은 가능한 한 빨리 강화돼야 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남한 반동세력의 억압 수단과 반공 신경질이 금지돼야 한다. 북한은 평화공세로 남북의 문호를 개방해서 남조선인민들에게 북한사상의 영향을 미쳐서 남한의 민주화를 달성하려는 것이다(Woodrow Wilson Digital Archive 1972a).

 

남북한은 1971년 9월 20일 남북적십자 1차 예비회담을 개성에서 개최하고 회담을 계속했으나 쉽사리 의제선정에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난항을 거듭했다. 11월 20일 남북대화의 실무를 맡고 있던 한국의 정홍진과 북한의 김덕현이 별도로 비공개 만남을 합의하고 판문점에서 시작해서 평양과 서울을 거치는 어려운 협의를 통해 72년 3월말 최종적으로 이후락과 김영주의 남북교환방문을 합의했다. 이에 따라 이후락 정보부장은 1972년 5월 2일 역사적 평양방문을 하게 된다. 이후락 부장은 김영주와 두 번의 회의를 했고 5월 4일 0시 15분부터 1시 30분까지 평양 만수대 김일성 관저에서 김일성 수상을 만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이후락 부장이 먼저 자주적으로 통일을 해야 하는 것이 박대통령의 뜻이라고 말한 다음에 김일성 수상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 통일 3대원칙”을 반복해서 강조했고 이후락 부장은 “세가지 원칙을 통일의 기둥으로 삼고 통일은 꼭 이룩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박대통령의 생각도 동일합니다.”라고 답변했다 이후락 부장은 4일 오후 1시에서 2시10분까지 다시 김일성 수상을 만났다. 김일성 수상은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이 외세배격하고 외세에 의해서 통일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러한 우려가 없어졌고 또 남조선은 우리가 남침한다고 우려했는데 내가 전쟁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런 우려 없어졌고 남은 문제는 민족단결을 위해서 이념을 초월하여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다음에 다시 한 번 “이제 두 가지 오해 풀었습니다. 첫째, 미국, 일본과 결탁하여 전쟁하려 하지 않는다. 둘째, 남침, 적화 통일하려 하지 않는다. 이제 오해 풀렸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단결문제인데 이것은 더 연구하고 토의하면 해결될 것입니다.”라고 결론짓고 있다(김일성 1992-2012b; 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b; 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c).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은 5월 29일 서울에 도착하여 이후락 부장과 가진 1차 회의에서 지난 5월초 이후락-김일성 회의 결과를 다시 한 번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d).


우리는 남조선에서 집권하고 있는 분들이 미국과 일본에 의존하여 살아가려 한다고 생각했으며 남에서는 우리가 남침을 하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남북이 서로 오해하고 불신한 근본문제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번의 평양회의에서 그 쪽에서는 외세에 의존할 생각이 없고 절대로 대미 대일 관계에서 자주성을 잃지 않겠다는 것을 말씀하였고 우리는 애당초 남침할 의도가 없고, 우리 제도를 남조선에 강요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언 하였습니다. …… 조국통일의 근본적 입장에 대해서 원칙적 합의를 본 조건에서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이미 합의된 원칙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구제적인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풀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성철 부수상은 이후락 부장과의 두 차례에 걸친 회의에서 구체적인 문제들로서 조절위원회의 설치, 기타위원회, 합의내용의 공개문제 등을 논의했다. 또한 그는 5월 31일 저녁 7시에 40분간에 걸쳐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여 “조국통일 3대원칙에 평양회의에서 합의했으며, 오해와 불신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였고, 서로 신임을 두터히 하고 민족의 대단결을 도모하자”는 준비된 원고를 낭독하였으며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 3개 원칙의 합의를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며, 협의기구를 만드는 것은 찬성이나 추진방법은 현재의 상호불신을 고려하면 단계적으로 해야 하며, 합의내용의 공개는 반대하였다 (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i).


남북한 실무 팀은 6월 21일부터 30일까지 남북공동성명 합의서를 준비하여 7월 4일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으로 발표했다(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e). 북한 외무성 부상 이만석은 7월 17일 사회주의 우방국들에게 <7.4 남북공동성명>의 추진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공동성명의 내용을 요약했다(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f). 그리고 성명의 핵심인 통일 3대 원칙은 김일성 수상이 이후락을 만났을 때 처음 제안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완벽하게 동의했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정부의 패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만석 부상은 <7.4 남북공동성명>의 영향을 남한 혁명역량 강화와 국제 혁명역량의 측면에서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선 남한의 혁명역량강화를 바람직하게 평가했다. “남조선 인민들은 만장일치로 공동성명을 대사건이라는 것에 동의했고 기쁨과 열정으로 이를 지원”했으며 “남한의 야당과 주요인사들은 정부가 제정당의 참여 없이 북한과 직접 대화를 재개한 것에 항의”했고 “야당들은 반공법과 비상조치들의 철폐를 요구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남한지도자들이 눈에 띄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그가 남북한의 사회단체, 개인, 체육인들의 교류 방문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언급한 것과 더불어 이후락 부장이 기자회견에서 북한과 대화를 확대하고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현실에 맞게 개정하고 새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두고 한 얘긴데, 김종필 총리는 이러한 논의에 관해 국회질의 응답에서 반공법과 비상법들을 바꿀 필요가 없고, 북한을 아무나 여행할 수 없으며, 북한방송 청취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성명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국제혁명역량 강화의 평가에 대해 이만석은 “미국은 수사적으로는 성명을 환영했으나 다른 한편 으로는 괴뢰정부를 지원하고 돕기를 원하고 있다.”며 조금 더 신중했다. 7월 5일 미 국무부는 공동 성명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근대화는 계속된다고 선언했고, 미군 규모는 줄지 않을 것이며, 통일은 유엔 감독하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성명의 영향을 조심스럽게 분석한 북한은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남조선 지도자들이 모두 미래 협상에 참여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남한을 미국과 일본에서 떼어 내고, 그들로부터 더 이상의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또 하나 북한의 초점은 미국과 일본이 더 이상 한반도 내부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적극적 조치로 남북한 간에 현존하는 장벽을 제거하고 폭넓고 포괄적인 연대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이만석 부상은 최종적으로 사회주의 우방들이 남한이 북한과 포괄적 협상을 하도록 만들고 결과적으로 남한을 “국내적 그리고 국제적으로 고립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남한의 추가적 고립화를 적극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계속)

    http://www.eai.or.kr/type_k/panelView.asp?bytag=p&catcode=+&code=kor_report&idx=12849&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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