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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공진화전략 연구패널 보고서] 2032 북한선진화의 길 : 복합그물망국가 건설
 

2010-09-02 

초록

지난 15년 동안 선군정치는 핵개발, 선군경제, 김정일 친위세력의 구축을 통해 강성대국의 길을 열고자 하였으나 경제제재와 핵실험의 악순환, 경제성장 부진, 후계체제 구축 문제에 직면하면서 안보, 경제, 정치의 3대 난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김정일 후계체제가 21세기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고 주인공의 일원으로 서기 위해서는 2단계에 걸친 선진화 공진전략이 요구된다. 1단계 전략은 ‘이행과 개혁’으로, 북한 스스로 선군정치에서 벗어나 핵 없는 신생존전략 추진, 복합그물망을 치는 신평화체제구상, 그리고 북한형 개혁개방정책을 추구하는 선경제정책으로 이행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한국과 주변 세력이 햇볕과 제재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북한과 공진화(coevolution)하여 남북•동아시아•다자의 3중 복합평화체제를 마련하고, 국제적인 북한 번영 협력체제를 마련하여야만 1단계 전략이 성공할 수 있다. 2단계 전략은 ‘변환’으로, 북한은 21세기 문명표준인 ‘복합 그물망국가’에 부합하도록 안보, 경제뿐 아니라 문화, 환경, 지식, 정치 무대에서 21세기 복합국가로의 변환을 추구해야 한다. 1단계와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의 공동진화 노력이 필요하므로 동아시아 공동체의 건설과 한미중의 복합그물망치기가 요구된다. 이처럼 남북한이 공진화와 통일을 통해 21세기 복합 그물망 짜기에 성공한다면 한반도는 새로운 문명표준의 가능성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1. 서론

 

2012년은 북한 지도부가 공식적으로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겠다고 천명한 해다. 그러나 현실은 어둡다. 핵선군주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관적 안보불안은 심화되고 있으며 이에 따른 과잉안보국가의 길을 걷고 있다. 화폐개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최빈국의 비극을 겪고 있다. 과잉안보를 위한 과잉 지출에 따라 21세기 선진화의 기본 무대인 문화, 환경, 그리고 지식에 적정 투자가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북한에서 국내외 통치를 주도해 온 선군 수령체제는 김정일의 건강 때문에 불가피하게 후계체제를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후계체제가 선군(先軍)정치대신 선경(先經)정치의 새로운 길을 추진할 전망도 불투명하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북한은 3중고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국제적으로는 1991년 사회주의 국제질서의 붕괴라는 세기사적 격변을 겪고 국내적으로는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을 맞이한다. 김정일 후계체제는 인구의 상당 수가 굶어 죽는 “고난의 행군”을 치르면서 1998년 21세기 국가목표로서 강설대국 건설을 새로 내걸었다. 그 해 5월 22일 로동신문 정론은 강성대국을 “조선을 이끌어 21세기를 찬란히 빛내시려는 담대한 설계도”라고 밝히고 있다. 북한은 인류사의 수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강성과 번영을 추구하였으나 역사는 진정한 의미의 완성된 강성대국을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북한은 21세기 강성대국을 위해서 수령중심으로 “사상의 강국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여 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튼튼히 세우고 그 위력을 경제건설의 눈부신 비약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 장군님의 주체적인 강성대국방식”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은 1999년의 신년 공동 사설에서 1999년을 강성대국 건설로 전진하는 새로운 전환의 해로 명명한 후 10년이 지난 2010년 공동 사설에서도 여전히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 경제강국을 3대 기둥으로 삼는 강성대국방식을 21세기 생존전략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만 궤도에 오른 정치사상과 군사강국에 이어 중공업 발전과 함께 인민생활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경제강국 건설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은 21세기 강성대국 건설을 위해 1999년 6월 16일 “우리당의 선군정치는 필승불패이다”라는 공동논설에서 “제국주의와 반제자주세력이 가장 격렬하게 맞서고 있는 투쟁의 시대에 제국주의와 장기적인 대결 속에서 시회주의 위업을 달성하자면 마땅히 군사가 중시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선군정치를 “우리 시대의 완성된 정치방식이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이어서 “선군정치 방식은 바로 군사선행의 원칙에서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내세워 사회주의 위업전반을 밀고 나가는 령도방식”이며 “혁명군대의 강화를 통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적 지위를 보장하고 인민대중의 창조적 역할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방식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정일 체제는 새로운 정치방식으로서 선군정치를 강조하게 된 것을 1990년대 중반 “주체조국을 둘러싼 정세변화”와 “혁명과 건설 앞에 조성된 류례없는 난국”으로 설명하고 있다. 정세변화로는 사회주의권의 몰락, 김일성의 사망, 미국의 군사적 위협, 김영삼 정부의 ‘강경책’의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성된 난국’으로서는 다음의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대외무역의 70-80%를 점하고 있던 사회주의 시장이 붕괴함으로써 경제건설에 적지 않은 지장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과 일본의 경제제재는 ‘국제적인 금융거래의 길을 완전히 차단’하였고 북한을 ‘경제적으로 질식시키고 말리워 버리려’했다는 것이다. 셋째, ‘몇 해째 련속 들이닥친 큰물과 해일, 가뭄 등 파국적인 자연재해’를 들고 있다. 그 결과 ‘혹심한 식량난, 연료난, 동력난’이 발생하여 북한은 본격적인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북한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력사는 제2차세계대전시기 레닌그라드의 900일 봉쇄를 인류가 당한 가장 참혹한 재난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처참한 900일보다 훨씬 더 길고 더 잔인한 봉쇄의 나날이 계속되고 한 개 도시가 아니라 온 나라가 통째로 원쑤들의 포위에 든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하나의 적이 아니라 사면팔방에서 달려드는 제국주의 련합세력의 공격을 물리쳐야 하는 나날은 아직까지 그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는 준엄한 날들이었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기 위한 선군시대의 개막을 1995년 1월 1일로 잡고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군시대는 1998년에 공식화된다. 1998년 9월 5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회의에서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되고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방위원회 중심의 선군체제를 수립했다. 김정일의 국방위원회 추대 연설을 맡은 김영남은 “국방위원장의 역할을 나라의 정치, 군사, 경제 력량의 총체를 통솔 지휘하고 사회주의 조국의 국가체제와 인민의 운명을 수호하며 나라의 방위력과 전반적 국력을 강화 발전시키는 사업을 조직령도하는 국가의 최고직책이며 우리 조국의 영예와 민족의 존엄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성스러운 중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선군시대의 쇠퇴

 

21세기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새로운 정치방식으로 선택한 선군정치는 지난 15년 동안 북한이 당면하고 있는 안보, 경제, 정치의 3대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핵문제의 악순환

 

선군정치의 최우선 목표는 사회주의 국제질서의 붕괴에 따른 김정일 수령체제의 결사옹위였다. 선군정치는 1994년 제네바기본합의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핵동결과 핵시설 해체의 대가로서 경수로 건설과, 중수로 공급을 받으면서, 미국과 북미관계 개선 협상을 진행했으나, 체제안전의 마지막 보루로서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편 북한의 핵확산을 막으려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노력은 북미간의 워싱턴회의까지 진행했으나 북한의 과잉안보적 요구 때문에 현실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더구나 2001년 9.11테러를 겪은 미국은 핵확산과 핵테러를 단순히 지구 안보 문제가 아니라 최대 국가 안보문제로서 다루기 시작했다. 북핵문제가 미국과 북한 모두에게 생사가 걸린 싸움이 된 셈이다.

 

2002년 10월초 켈리 미국무부 동아태차관의 평양방문에서 제기된 고농축우랴늄(HEU) 프로그램 문제로 제네바합의가 붕괴하고 제2의 북핵위기가 시작됐다. 결국, 중국의 중재로 이루어진 6자회담은 2005년에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9.19 공동성명에 일단 합의한다. 그러나 2005년 공동성명의 기본 골격인 북핵의 포기, 경제 지원, 관계 정상화, 평화체제라는 마(魔)의 사각관계는 94년 기본합의서와 마찬가지 운명을 겪게 된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 포기를 우선으로 하는 핵포기의 일괄타결방안으로서 경제제재 해제 및 경제지원, 수령체제 옹위를 핵심으로 하는 평화체제 구축, 그리고 북•미 관계개선에 따라서 핵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북한의 검증 가능한 핵포기를 우선으로 하는 대북 경제•군사•외교 관계 개선을 강조했다.

 

6자회담은 마카오 소재 방코 델타 아시아(BDA)를 둘러 싼 대북 금융제재 속에서 예상대로 이행합의를 마련하지 못하고 2006년 10월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했다. 2007년에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3단계인 불능화, 신고, 비핵화에 원칙적 합의를 했으나 결국 신고와 검증 단계에서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북한은 2008년 4월에 핵협상 파기를 선언하고 동결과 불능화 조치를 원상복구하고 2009년 5월 25일에는 2차 핵실험을 했다. 북핵문제는 경제제재와 핵실험의 악순환을 반복하면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채 2009년 10월초 김정일 위원장은 중국 웬자바오 총리와의 회담에서 첫째, “조선반도비핵화”는 김일성주석의 유훈이며, 둘째, 북미양자회담을 통하여 북미사이의 적대 관계를 반드시 평화 관계로 전환해야 하며, 셋째, 북한은 북미회담결과를 보고 6자회담을 포함한 다자회담을 진행할 용의가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김정일 위원장은 2010년 5월초 중국방문에서 북한의 기본 입장을 그대로 반복했다.

 

그러나 핵선군주의의 운명은 시간문제다. 수령체제의 핵무기는 삶의 담보가 아니라 죽음의 담보다. 북한이 끝까지 핵포기의 전략적 결단을 거부하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제재는 심화되고 미국과 중국은 핵없는 친중 정권의 등장을 암묵적으로 타협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9 11이후 대량살상무기 테러와의 전쟁을 안보의 최우선 순위로 삼고 있는 미국은 어떤 경우도 북핵을 현실로서 인정하기는 어렵다...(계속)


[서장] 2032 북한선진화의 길 : 복합그물망국가 건설
[1호] 북한 공진화전략 연구 : 정치

[2호] 북한 공진화전략 연구 : 외교
[3호] 북한 공진화전략 연구 : 군사

[4호] 북한 공진화전략 연구 : 경제
[5호] 북한 공진화전략 연구 :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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